선후 두번 찾은 봉래 척계광 옛집
李光仁 朝鲜族足迹
2017年11月03日 10:41 听全文
알아야할 우리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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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6일 조글로 작가미니홈에 “남장성ㅡ강남장성 어디에 있을까” 현지답사기를 올린후 반응이 비교적 강렬한가부다. 지금까지 조회수3000 돌파가 이를 잘 알려준다. 흥미로움은 이 답사기를 올려 얼마 안되여 항주의 후배친구 현충혁이 척계광의 이우병 관련 옛 이야기가 이우시 남쪽에 세워진 장성공원에 알려지고, 옛날 하북성 산해관 근처에서 장성을 지키던 이우병들과 그 후예들이 모여 살던 이우촌을 발견했다는 중문뉴스를 댓글로 알려준 것이라 할가. 민족영웅 척계광의 형상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면서 산동 봉래에 있다는 척계광의 고향과 옛집을 가보고싶은 마음이 보다 강렬해났다.

2011년 4월 3일, 절강 림해 강남장성에서 현지촬영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13년 8월 7일 첫 산동 봉래행에 봉래시가지에 위치한 척계광 옛집을 찾아볼 기회를 가지였다. 4년이 흐른 2017년 10월 31일에는 다시 산동 봉래행에 나서면서 두번째로 척계광의 옛집을 현지답사하였으니 마음은 후련하기만 하였다. 첫번째 답사가 아들애와의 답사라면 두번째 답사는 일가족 셋의 답사였으니 안해는 평소 척계광에 대해 민족영웅이라는 정도뿐 흥미가 돌지 못했는데 몇년전 절강 림해 강남장성에 이어 고향집까지 찾으니 척계광에 대한 인상이 한결 깊어진다고 내심을 토로한다.
그럴수밖에 없지, 산동 봉래에 이르는 사람들치고 척계광의 옛집을 찾으면 느낌이 완연 달라만 지니 옛집위치는 현급 봉래시의 종루서로(钟楼西路) 1번지, 즉 종루서로 남쪽가요 화하서로(画河西路) 서쪽가에 자리하여 길손들의 발목을 잡고 놓질 않는다.

2016년 5월 4일, 교동반도 최남단 성산두에서 현지촬영
아침식사후 주숙처 주인은 자가용으로 우릴 삼선산 부근의 6선버스 정류소로 안내하여 주었다. 주인의 말대로 6선버스가 열한번이나 버스정류소를 바꾸니 오른쪽 길가에 “척계광 옛집”(戚继光故里)이라는 중문 다섯자가 박힌 현대식 패방(牌坊)이 보인다. 패방이란 원 의미는 봉건사회에서 공덕과 덕성이 있는 자를 기념하고저 세운 안내건축물을 말함이니 눈앞의 그럴듯한 패방자체가 척계광의 위인됨을 먼저 알려주고있었다.
척계광 옛집 첫 패방내에 들어서니 골목길 중심부 바닥은 돌매돌을 방불케하는 원형의 돌을 깔아 무척 인상적이다. 골목길 량켠은 모두 단층집으로 이루어진 옛집모양의 건축물들로서 골목길을 걷는 우리에게 옛스러운 기운을 한껏 풍겨주고 있었다. 골목길따라 한참 걸으니 골목길 왼쪽가에 고색이 짙은 또 하나의 패방이 나타난다. 이곳 패방은 “부자총독”방 중문글자가 박힌 패방으로서 그 웅위함과 풍만함은 대번에 중국내에서는 보기드문 명나라 시절 대형 석조진품(石雕珍品)임을 과시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부자총독이란 척계광과 그 시절 명나라에서 선후로 등주위지휘첨사(登州卫指挥佥事), 도지휘(都指挥), 산동 연해 군사책임, 보정 도지휘사, 강남운량파총(运粮把总)으로 지낸 그의 아버지 척경통(戚景通)을 가리키는 부름이였다.

2017년 10월 31일, 현지촬영 (이하 모두)
일찍 30여년전 그 시절부터 명나라 시절 료동총독인 조선인 리성량과 그의 아들 리여송을 추적하면서 알게된바이지만 등주위지휘검사란 군사관직은 장군급을 가리키는데, “지휘”란 용사 1만명 이상 거느리는 자만이 가질수 있고 지휘 군사관직을 세습할수도 있었다. 척계광의 5대 할아버지 척빈(戚斌) 때부터 이들은 등주위지휘첨사를 이어왔으니 척빈의 5대손인 척계광도 자라나서 등주위지휘첨사로 활동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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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자총독 패방으로 돌아오면 이 패방은 척계광의 옛집을 중심으로 하는 서쪽의 패방이고 동쪽에는 또 하나의 패방ㅡ“모자절효”(母子节孝)가 자리하고있다. 모자절효 패방은 명나라 조정에서 척계광의 그의 어머니 염씨를 기리고저 세운 패방이라고 알려진다. 중국 봉건시대의 산물인 이런 패방은 건축과 조각, 서법 등이 일체화한 패방으로서 력사적함의와 문화적 함의가 자못 깊다. 명나라 가정(嘉靖) 44년(1565년)에 조정에서는 척씨가족의 공로를 기리여 민족영웅 척계광의 옛집인 봉래에 똑같은 두개의 패방을 세웠었다. 450여년이 지난 오늘도 두 패방은 름름히 서 있으니 두 패방사이의 직선거리는 143메터.

척계광의 옛집과 척부(戚府)로 알려지는 척가사당(戚家祠堂)은 오늘날 봉래시의 명물로서 부자총독과 모자절효 두 패방사이 중심지에 자리하고있다. 관련자료는 척가사당은 두 패방에 앞선 명나라 숭정8년(1635년)에 지어지고 청나라 강희(康熙) 46년(1707년)에 수건되였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200여년에 달하는 청나라 지속기간 척씨가족은 점차 쇠퇴의 일로를 걸으며 척씨 사당은 황페화를 면치 못하였다. 민국초년에 이르러서는 조금 남은 옛집들까지도 남들에게 귀속되고만다. 1985년에 당지정부에서 척씨사당 등을 국유화하면서 전면 수건를 실시할수있는 토대를 마련할수가 있었다.
척계광 옛집은 중화전통문화유산를 보호하고 애국주의정신을 기리는데서 자못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었다. 봉래시에서는 척계광이란 이 명나라 시절의 걸출한 군사가와 민족영웅을 기리고저 1999년에 척계광 옛집을 다시 수건하면서 대외에 개방한데서 필자는 선후 두번에 걸쳐 현지답사할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그것도 필자 혼자만이 아닌 일가족의 유람으로 말이다.

봉래 척씨관련 력사를 거스르면 척계광의 6대 할아버지 척상(戚祥)를 선참 떠올리게 된다. 척상은 종군 30년에 주원장을 따라 원조를 뒤엎으며 명조를 일떠세운 개국공신의 하나인데 나중에 싸움터에서 전사하게 된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척상의 공훈을 아끼여 척상의 아들 척빈을 등주위지휘첨사로 내세우고 세습할수 있게 하였다. 그러면 이들 척씨력사는 6대 할아버지 척상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600여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알수 있다. 이 600여년의 세월속에서 이들 척씨네는 봉래에 숱한 문물고적을 남겨놓았으니 그 문물고적은 오늘의 척부와 척계광병기관(兵器馆), 후화원(后花园), 패방거리 등으로 이루어져 해마다 적지 않은 유람객을 끌어들이고있다. 풍경구를 이룬 척계광 옛집의 점유면적은 9.2헥타르에 달하였다.

2017년 10월 29일, 연태 봉래 봉래각에서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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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부로 불리우는 척씨사당을 답사하는가운데서 필자는 척계광(1528ㅡ1588)의 자는 원경(元敬)이고 호는 남당(南塘)이며 원래 봉래사람임을 깊이깊이 리해하게 되였다. 척계광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원대한 뜻품으며 자라다가 17세 때 (嘉靖 23년, 1544년)아버지를 이어 등주위지휘첨사 직을 맡게 된다. 그후 가정 32년(1553년)에 산동방왜(防倭)군사를 맡은 도지휘첨사로 활동하기도 한다. 가정(嘉靖) 34년(1555年)에는 도동첨사(都同佥事)로 절강 등지에 파견됨을 보인다. 1년후에는 참장(参将)으로 임명되여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녕파, 소흥과 대주 3부를 맡아나선다.
앞의 글에서 이미 서술한것처럼 척계광이 나서 자란 명나라 가정년간은 중국 동남연해에 왜적이 창궐하던 시절이였다. 척계광은 절강, 복건,광동 등지에서 선후 13년간 활동하던 기간 당지 항왜(抗倭)명장인 유대유(俞大猷)와 함께 80여차례 전투를 거듭하며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게 된다. 절강 대주 림해에만 8년간 머무르면서 척계광은 고장성ㅡ강남장성을 수건하고 장성의 곳곳에 쌍층적대(双层敌台)를 세우면서 가정 40년인 1561년에 대주(台州)의 선거(仙居)에서만 9전9승으로 왜적의 침입을 물리치는 공훈을 세우기도 한다. 동남연해지구에 기여든 왜적들을 기본상 제거하면서 백성들의 생명재산안전을 지켜내였다.

척계광은 륭경(隆庆) 2년인 1568년 5월에 조정의 명에 의해 북경 부근의 계주(蓟州)로 활동지대를 옮기면서 장성을 지켜서게 되였다. 그는 처음 도독동지총리(都督同知总理)로 계주(蓟州) 창평(昌平), 보정(保定) 3진의 장병들 조련을 맡아보게 된다. 명나라에서는 중앙에 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대도독과 좌우 도독아래에 종1품(从一品)인 도독동지를 두었으니 도독동지는 이만저만한 관직이 아니다. 척계광은 또 도독동지총리를 넘어 총병관(总兵官)으로 임명되기도 한다.
척계광이 갓 도독동지총리와 총병관으로 활동하던 시절 장성을 지켜선 명나라 군대들은 해이하고 전투력이 없었다. 척계광은 제때에 조정에 글을 올려 절강 동부에서 병사들을 새로 모집하자고 하였다. 척계광의 병사모집 주요지구는 절강의 소흥(绍兴)과 금화(金华) 지구였다.

이듬해 1569년에 첫패로 3000여명 강남병사들이 북상하게 되였다. 그뒤 또 한차례의 병사모집으로 당년 장성연선에서 장성을 지켜선 이우병들은 1만여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척계광의 척가군(戚家军) 골간력량으로 되여 장성수건과 장성방위에서 거대한 역할을 놀았다. 이같이 척계광은 북방에서 장성을 지키며 북부강역北部疆域을 보위하며 16년 세월을 보내니 조정에서는 총병관에 이어 태자소보(太子少保) 벼슬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만력(万历) 11년에 척계광은 광동에 파견되였다가 조정의 당쟁연루로 파직되여 고향 등주 봉래로 귀환함을 보이며 얼마후 병으로 세상을 뜨게 되였다. 척부를 답사하노라니 척계광의 일생이 하나 또 하나의 장면으로 환히 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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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부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척계광은 중국력사상 걸출한 군사가일뿐만아니라 이름난 시인이고 서법가이며 숱한 병서를 써낸 장군이라는 점이다. 병서만 해도 18권본 “기효신서” (纪效新书)와 련병실기(练兵实纪) 그리고 14권본 “기효신서”(纪效新书), 시문집 “지지당집”(止止堂集)이 알려진다. 하기에 척부의 관련소개에서는 중국력사 2000년을 돌아보아도 숱한 병서를 써낸 장군이면서 시인이고 서법가인 군사가는 척계광이 유일무이하다고 평가하기에 이른다. 척계광은 또 걸출한 병기전문가(兵器专家)이고 군사공정가이기도 하였다.

척부를 돌아보면서 안해는 척계광을 단지 왜적을 물리친 민족영웅으로만 알았더니만 시인, 서법, 병서에 병기전문가, 군사공정사를 겸한 위대한군사가임을 몰랐다면서 련속 찬탄을 금치 못한다. 2017년 10월 31일 현지답사가 가져다 준 하나의 성과라 하겠다.
사실 2013년 8월 7일과 2017년 10월 31일 두번의 답사에서 거둔 최대의 성과는 척계광을 따라 북상한 절강의 이우병사들이 400여년간 장성을 지키였고, 지금도 허다한 이우병 후손들이 장성연선에 살고있다는 신선한 뉴스를 현지에서 보다 확인하게 된 것이리라. 척계광이 1568년에 북경 부근의 계주(蓟州) 등지에서 계진총병(蓟镇总兵)으로 활동할 때 많고많은 이우병들이 따라 섰고, 그 후손들 뉴스가 오늘도 그침없이 전해지고있다고 하니 안해는 무척 흥미를 가진다.
일찍 2006년 9월부터 2016년 초까지 우린 절강 소흥에서 10년간 대학교편을 잡으면서 가까운 이우시에 수차 다니는 가운데서 이우에 대해 깊은 리해를 가지게 되였었다. 게다가 해마다 우리가 배워주는 대학생들 속에는 이우출신의 대학생들이 적지 않아 더구나 그러하다. 따라서 절강이요, 이우요 하면 내 고향 연변처럼 아주 친절히 느껴지는데 황차 명나라 시절 민족영웅 척계광은 절강일대에서 활동하지 않았던가.

지난 2009년 봄에 하북성 진황도시 무녕현(抚宁县)의 장성연선에서 많은 고대무덤들이 발견되였다. 관련 고고학자들의 고찰결과 400여년전 명륭성년간에 척계광이 계진총병으로 북방의 무녕현에 진출할 때 따라선 절강 이우병들의 무덤이라는것이 알려졌다. 그들은 척계광을 따라 장성연선에서 훈련하면서 장성수건에 참가하였는데 산해관에서부터 북경 창평에 이르는 장성구간에만도 선후 1337개의 적대(敌台)를 수건한 성과를 올리였다. 그러다가 삶의 뿌리를 타향에 내리였었다. 이는 2011년 4월이후 관련자료를 통해 알게 된 신선한 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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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년간 진황도시 문화국의 조사에 따르면 진황도시 경내 374. 5킬로메터에 달하는 명나라 장성연선에는 동가구(董家口), 화장욕(花厂峪) 등 158개 자연촌들에 당년 장성연선을 지켜선 이우병들의 후손들이 섞이여 살면서 사실상 장성연선의 “이우촌”(义乌村)을 이루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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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년간 절강성 이우시 지방지(地方志) 사업일군들은 수차 하북과 료녕의 장성연선에 가서 이우병 후예들의 생활상황을 조사를 벌리였다. 2010년 여름에는 이들 지방지의 요청으로 진황도시 동가구(董家口), 성자욕(城子峪), 판장욕(板厂峪) 등지의 이우적 장성후예들이 절강 이우로 가서 조상들의 뿌리찾기에 나서기도 하였다. 관련뉴스를 보면 장성연선의 이우촌 정보는 지난세기 말 료녕성 수중현(绥中县)에서 선참 알려졌다. 그 시절 수중현의 조씨(曹姓人)들은 자기들 대표를 절강 이우현에 보내여 조상을 찾게 하였었다.

이는 최근년간의 척계광 관련 자료수집과 선후 두차례 봉래 척계광 옛집을 현지답사하면서 알게 된, 척가군에서 활동한 절강 이우병들의 생생한 력사자료라 하겠다. 2011년 4월은 소흥에서 생활한 기간의 절강 림해 현지답사라면 산동 봉래 척계광 옛집 현지답사는 삶의 무대를 위해 석도로 옮긴후의 현지답사이니 절강 소흥을 제2고향으로 살던 우린 산동 위해를 또 제2고향으로 간주하면서 명나라 민족영웅 척계광과 다시 가까이 이어지게 되였다. 력사적이나마 인연은 인연이라 하겠다.
선후 두번 찾은 봉래 척계광 옛집, 민족영웅 척계광은 보다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ㅡ2017년 11월 1일 위해 석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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