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몽규 남경 부자묘에 자취 남기다
李光仁 朝鲜族足迹
2017年10月23日 08:33 听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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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출신의 항일독립운동가 송몽규가 19살 한창나이에 학업도중이던 룡정은진중학교를 떠나 남경행에 오른 시간은 1935년 4월이고 그 파견자는 은진중학교 명의조선생이란것은 윤동주, 송몽규 연구가이면 누구나 다 알고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송몽규가 다니던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 조선인특별반 제2기생 첫 훈련지 남경 부자묘 가까이 동관두(东关头) 32번지가 구체적으로 어디인가를 아는 사람은 별반 없는줄로 안다. 30여년이나 우리 력사와 씨름한 필자도 여태 모르고 지도에서 찾아본 것이 고작이다. 별수없이 남경사범대학교 한국어과 학부장으로 뛰는 유성운교수박사한테 부탁하니 두말없이 남경에 오라고만 한다. 그 믿음에 고마워 절강월수외국어대 시절 2013년 9월 19일과 20일 마침내 남경행에 올라 보았다.

진회하를 끼고앉은 남경 부자묘(夫子庙)풍경구
강소와 절강은 서로 이웃하고있는 사이라지만 절강 소흥에서 강소 남경으로 가려면 반나절 시간은 허비해야 한다. 남경을 때때로 다니는 필자는 흔히 직통 쾌속버스를 리용하는데 한쪽에 5시간 정도 시달려야 한다. 몇달전에 이르러 장강삼각주를 이어주는 녕파-남경행 고속렬차가 달리면서부터는 소흥-남경행이 믿기 어려우리만치 그 절반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소흥에서 남경까지 한시간 50분 정도이니 유성운 젊은 박사가 친구와 함께 자가용으로 맞아준다. 상해, 강소, 절강과 더불어 급속히 발전변화하는 장강삼각주의 현실을 그속에서 피부로 느끼며 경탄하지 않을수가 없다.

부자묘풍경구를 흐르는 진회하에 유람선이 뜬다
점심식사후 유성운박사와 친구는 자가용으로 남경 자금산 북쪽기슭으로 안내한다. 자금산 북쪽기슭에는 남경항일항공기념비가 울창한 숲속에 우뚝 일어서고 일제침략자들과 싸우다 쓰러진 조선인비행사 전상국, 김원영 두 렬사가 모셔져 있다. 남경행 걸음에 남경 동관두 32번지와 남경항일항공기념비를 현지답사하고 싶다고 했더니 이들은 거리상 가깝다는 자금산 북쪽가로 먼저 안내한 것이다. 그 소행이 그지없이 고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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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은 2013년 9월 20일, 이날 오전 상해서 모처럼 달려온 연변인민출판사 상해지사 김창석지사장과 딸애 김미려가 동행한데서 우리 답사팀은 남경과 상해, 소흥의 만남으로 되였다. 어깨가 들썩해 나는 일이다. 언제나 쾌활한 남경사범대학 한국어과 주임 유성운박사는 앞장서 웃고 떠들며 우리를 남경 동관두 32번지(23번지?) 로 안내하였다. 찾고보니 남경 도심의 동관두 32번지는 옛 수도(古都)로 이름난 남경의 유람명승지 부자묘(夫子庙)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동수관 가까이 진회하 일각
“유박사, 잘못 오지 않았나?! 부자묘이면 소인이 남경에 올 때마다 찾는 유람지인데.”
“헤헤, 그래도 이곳인걸 어찌 하옵니까.”
언제보나 걸쩍 걸쩍 나오는 유박사를 보고 동을 달았다.
“언제던가? 당신이 남경을 알려면 부자묘를 알아야 한다면서 나를 이리로 선참 안내하지 않았나?”
“그때는 그때지만, 이렇게 다시 오시라고 한것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우린 통쾌하게 웃고웃었다. 김창석씨는 “선생들은 부자묘통이군요.”하면서 풍을 달았다.
“부자묘통이라지만 송몽규도 모르고, 동관두 32번지도 모르는 얼뜨기통이지유.”
와그르르 웃음이 길에 넘쳐났다.

진회하를 가로 탄 궁형다리 멋지여
그때 우린 유람객들로 붐비는 부자묘를 꿰지르고 있었다. 부자묘는 규모가 웅장한 대성문(大成门), 대성전(大成殿), 명덕당(明德堂), 존경각(尊经阁) 등 고대건축물로 이루어지고, 송나라 시절--청나라 시절을 거치면서 공자님께 제를 지내고 공양하는 옛스럽고 성스런 고장으로서 중국 4대문묘(四大文庙)의 하나로 불리운다. 공자묘 앞은 그림같이 아름다운 진회하(秦淮河)를 둥그런 늪으로 하고 룡으로 그려진 길이 110메터, 높이 20메터의 굉장한 남안 담장ㅡ조벽(照壁)을 배경으로 하면서 중국 최대의 조벽으로 이름높다면 진회하 북안의 명나라 시절 과거시험장(国子监科举考场)ㅡ공원(贡院)은 남경 부자묘의 일대 유람경관으로 떠오른다.

진회승경 입구. 진회승경과 십리진회하 입구에 들어서서 한참 나아가면 남경성벽 옛 동수관유적지와 동관두가 보인다
소개로 보는 남경 부자묘의 간략한 소개지만 이같은 력사의 고장 유람지에 우리 겨레 송몽규가 거닐었다면 믿을수가 있을까. 그것도 룡정 은진중학교를 중퇴한 19살의 한창 나이에 말이다. 우리 일행은 눈으로 보이는 생생한 현실앞에서 머리를 끄떡이지 않을수가 없다.

십리진회를 알린다
송몽규의 넋이 어린 남경 동관두 32번지는 풍경이 수려한 부자묘 바로 동쪽가로 이어지고있었다. 허나 진회하가 흐르는 남쪽가에 진회하와 병행으로 뻗은 동관두거리에는 동관두 25번지까지는 있어도 32번지는 종내 보이지 않았다. 우리와 숨박꼭질 하는것만 같았다. 품을 들이며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답사하고퍼도 나 하나가 아니여서 단독행동을 하기가 눈치가 보인다. 지닌 카메라도 이때따라 초점이 흐리여 온전한 사진 한장 찍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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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를 확인만하고 세세히 밝히지 못한 남경 동관두 현지답사는 이렇게 흘러갔다. 송몽규발자취로 말하면 첫 현지답사라 하겠지만 내내 마음에 걸린다. 10여일후 다시 남경 동관두 32번지를 찾아서야 마음이 조금 풀리는것 같다.
그날은 10월 5일 오전, 조카 결혼으로 국경절기간 산동 위해를 찾았던 필자는 귀로에 남경에서 내려 하루밤을 지냈고, 해살이 펴이자 곧추 부자묘를 찾았었다. 본문에서와 같이 남경 동관두 32번지는 부자묘 가까이에 위치, 진회하와 평행하면서 그 동쪽가가 부자묘의 계속인 또 다른 풍경구ㅡ남경 도심10리 진회하 내 남경성벽을 이루는 유명한 동수관(东水关)유적지여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옛 동수관유적지 지나면 동관두 구내에 들어선다
부자묘와 동수관유적지를 이어주는 고리는 남경 도심을 흐르는 진회하이다. 내하와 외하(内河和外河)로 이루어진 진회하는 남경의 어머니강(母亲河)으로~제1대하로, 중국제일력사문화명하(中国第一历史文化名河)로 불리운다. 장강 하류의 하나의 지류로 다시 장강에 흘러드는 진회하 길이는 110킬로메터라지만 강의 대부분이 남경시 경내를 거치면서 공자묘를 중심으로 하는 10리 풍경구를 이루니 명나라 제1대황제 주원장은 이 구간 진회하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동수관을 일떠 세웠었다. 지금의 동수관과 그 주변은 그림같이 아름다운 도심풍경구로 되여 많고많은 유람객들의 발목을 잡는다. 동수관 바깥끝변 큰길가에는 “진회승경”(秦淮胜境)과 “십리진회”(十里秦淮)라고 밝힌 웅장한 입구대문과 표시패가 하늘을 떠이며 일어서 유람객을 끌기엔 족하다.

동관두 3번지를 알린다
그젯날 남경 동관두 32번지는 고대문명이 그대로 발산하는 이런 풍경구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풍경구에서 시골 길림 연변의 19살배기 아이 송몽규가 자취를 남기며 군사훈련에 땀동이를 쏟아갔으니 이는 드팀없는 력사사실이렸다. 그래서 필자는 다시 재다시 남경 동관두 32번지를 찾아 송몽규를 찾고 또 찾는것이다.

동관두 진회하 여기저기는 사람들이 모여노는 놀이터로
오늘의 남경 동관두 32번지(23번지?)는 남경시 준회구 공자묘가두 동관두 사회구역내 주민위원회(南京市秦淮区夫子庙街道东关头社区居民委员会)에 자리잡고 있다. 동수관유적지 바로 서쪽가가 동관두 1번지고 그 다음부터 차례로 길따라 2번지, 3번지로 밝혀진다. 그것도 동관두 25번지까지이고 더는 보이지 않는다. 십자로 길 동쪽에서 끝나고 다른 번지들이 새롭게 시작된다.
어리벙벙하기만 하다. 어떤 력사자료에서는 32번지가 아닌 23번지로 지적되여 있으니 어찌된 판국인가? 송몽규 시절 동관두 32번지가 력사속에 사라졌을까 아니면 원래 32번지가 아닌 234번지였을까, 어리벙벙은 갈수록 짙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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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몽규로 보면 1932년 4월부터 6월까지 이곳 동관두 32번지(23번지?)의 커다란 중국민가에서 합숙하며 전문 군사훈련을 받은것으로 헤아려진다. 론문ㅡ“1935년 송몽규의 남경행 진실한 내막”에서 잔방위적으로 밝히기에 더 언급을 삼가하지만 흥미로움은 일찍 1967년에 출판된 현규환 저 “한국류이민사”(상)라 하겠다. 한국류이민사에 의하면 락양분교 부분에서 송몽규 등 제2기생 27명의 이름을 그대로 밝히면서 그 27명 중 송몽규를 여섯번째로 소개하고 있다. 흥미롭다함은 송몽규는 송몽규가 아닌 중국식 이름 왕위지(王伟志)로, 본명을 송몽규의 아명(儿名)인 송한범(宋韩范)으로 밝힌데 있다할까.

동관두 21번지. 23번지는 찾지 못하여
하나 중국식 이름 왕위지요, 아명 송한범이요 하는것은 그저 흥미로만 치우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당년 일본제국주의의 동북침략으로 일제의 피비린 마수는 항일에 나선 모든 피끓는 조선인 젊은이들에게 뻗쳐 있었으니 만일을 위해서도 모두 가명이나 중국식 이름을 쓰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이 송몽규에게도 그대로 나타나 당당한 제이름 석자도 밝힐수가 없었으니 나라 잃은 조선민족의 한은 내내 사라질줄 몰랐다. 그래서 송몽규랑 앙가슴에 더운 피 흐르는 조선민족의 아들딸들이 항쟁에로 떳떳히 나서지 않았던가. 그래서 연변도 아닌, 고대 문명이 살아숨쉬는 남경 부자묘와 동수관, 진회하를 산책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지 않았던가.

동관두는 25번지가 끝이였다
송몽규가 다닌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 조선인특별반 제2기생은 그 시절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 제2총대 제14대대 특설 제17대로 통하였다. 송몽규가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것은 1935년 4월인데 6월에 이르러 이곳 훈련소가 그만 남경의 일본관헌들에게 발각되는 액운을 당한다. 그 액운으로 송몽규 소속 패들은 남경에서 150킬로미터 떨어진 남쪽 태호가의 강소성 의흥현 룡지산 산속 징광선사로 훈련지를 옮겨야 했다. 그것도 6월부터 9월까지 임대기한이 차서 남경으로 돌아서는 수밖에 없다.
송몽규 소속 락양분교 제2기생들 세번째 훈련소는 남경성내 팔보거리 23번지(八宝街23)로 이어간다. 그 시간이 1935년 9월 18일이다. 이해 10월 초에 제2기생 정성언(郑成彦) 등 셋이 불행히도 남경 일본총령사관 경찰놈들에게 체포되는데서 또 네번째 훈련소가 뒤를 문다. 이 네번째 훈련소가 남경성내 람기가 8번지(蓝旗街8)로 알려진다. 보다시피 윤동주연구가이면 의례 그러려니 하던 강소 룡지산 1935년 10월 초 해산설과 많이 다르다. 이것이 송몽규의 진실한 력사이며, 남경 동관두 32번지(23번지?)와 강소 룡지산의 진실한 발자취이다.

두번에 걸친 남경 동관두 현지답사, 이 현지답사를 통하여 항일독립운동가 송몽규의 락양분교 훈련지와 그 주변이 환히 들어났다. 송몽규의 남경행은 남경과 강소 룡지산으로 나뉘여지니 먼저 남경 동관두 삶의 자취를 돌아본다. 1935년 이해 남경행을 통해 송몽규는 철저한 항일독립운동가로 성장했고, 또 이는 시인 윤동주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여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독립의 한길로 나아가게 되였다. 현지답사를 통해 얻으려는 것이 바로 이점이 아닐까.
ㅡ2017년 10월 22일 재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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