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랑촌 13용사 누구누굴까 2
李光仁 朝鲜族足迹
2017年10月11日 08:23 听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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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여 해질무렵을 앞두고 적들은 근거지 본부에 있는 어랑촌 동일(东一)학교마당에 집결하더니 여러대의 자동차에 앉아 퇴각길에 올랐다. 싸움터를 지혜롭게 탈출한 방상범 등 5명과 뒤산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던 2소대 대원들은 두개 패로 나뉘여 산에서 내려와 동지들의 시체를 찾기 시작하였다.
이날 마을과 논밭주위에서 중대장 김세 등 1소대 9명 유격대원들의 시체를 찾았다. 모두가 총들을 박산내고 장렬히 희생된 비장한 모습들이였다. 그들은 또 현위서기 최상동 등 여러 동지들의 시체를 찾아냈다. 알고보니 시체마다에는 비장한 이야기들이 깃들어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13용사전투의 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들이다.

화룡시 동쪽 변두리에 일어선 "십삼용사기념비" (자료사진)
당현위서기 최상동:
최상동은 그날 구위간부실에서 단잠에 들었다가 《적들이 왔다!》하는 소리에 와닥닥 일어났다. 적정을 헤아린 그는 김정한(金鼎汉), 김동해(金东海), 박정자(朴贞子), 문관오(文官吾) 등 5-6명 구위간부들에게 다급히 말하였다.
《집안에 가만히 있다가 놈들 총창에 찍려 죽겠는가, 뛰다가 죽더라도 모두 뛰자!》
그리고 구위간부 김정한 등과 함께 구위간부실 남쪽방향으로 내달았다. 김정한은 100메터밖의 유격대포대쪽으로 피하다가 오른쪽 옆구리가 따끔해났다. 그는 상처를 돌볼새도 없이 내처 달아 어랑촌마을의 어느 빈 6간집 정주칸 천정에 기여올랐다. 그는 겨우 살아났으나 최상동서기는 삼도구일본수비대의 고의사(高大夫)네가 쏜 총에 맞아 거꾸러졌다.
그때 일본수비대 한놈이 총창을 비껴 들고 그한테로 달아갔다. 찰나 쓰러졌던 최상동이 초인간적인 의력으로 번개같이 솟구치며 손에 쥔 차돌로 달려드는 놈의 대가리를 쳐서 즉사시켰다. 악이난 또 다른 한 수비대놈은 총창으로 마구 찔러댔다.

화룡시 서성진 어랑촌에 세워진 원 "십삼용사기념비"
적위대원 류억만:
류억만(刘亿万,일명 刘元浩) 어랑촌근거지의 공청단원이고 적위대원이였다. 그나날에 적위대에서는 매일 본부의 개판에서 보초를 서고있었다. 그날도 류억만은 어랑촌 단지부서기 리명배(李明陪,당원)와 같이 보초를 서다가 그만 날아드는 적탄에 불행히 희생되고 명배는 불행히 체포되였었다.
소선대중대장 차정숙:
차정숙(车贞淑)은 아동과 녀성들을 서쪽산으로 오르도록 이끌며 마을가 논밭에 나섰다가 적탄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놈들이 물러간뒤 정숙이를 찾아냈을 때는 생명이 경각을 다투고있었다. 정숙이는 가까스로 어머니를 알아보았다.
《엄마, 나 귀하나 없어요.》
《뭐라니?》
그제야 살펴보니 정숙이는 한쪽 귀가 없었다. 악귀같은 적들은 《승리》를 보고하고저 그 증거물로 정숙이의 한 쪽 귀를 베여갔었다.
약 반시간후 정숙이는 숨을 거두었다. 제때에 구급했으면 살수도 있을지 모른다.
이밖의 사람들은 오늘에 와서 그 이름과 신분을 알지 못하고있다. 이날 또 5명의 동지가 체포되여 끌려가 희생되였고 여러 동지들이 포위돌파중 부상을 입었다.

2017년 8월 3일, "력사동네 민속동네"에서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를 현지답사. 답사사진은 나와 여러 분들이 찍은 사진 (이하 모두)
체포된 동지들:
이날 토벌대놈들에게 불행히 체포된 동지는 도합 5명이다. 1982년 11월 11일에 필자가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구산 1대에 가서 항일투사 황옥순(黄玉顺)을 취재하였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날 5명중 분명한것은 2명이다. 하나는 안바지라고 불리우는 안학선(安学善)이고 다른 하나는 리명배이다. 안바지는 포위돌파중 산구비를 뛰다가 체포되고 리명배는 어랑촌바닥에서 보초중 서쪽산 감자굴에 숨었다가 놈들수색에 걸리였다. 리명배외 남자둘인데 하나는 잘 모르겠고 녀자 둘은 개구(开区)에서 왔다. 그들 둘은 어랑촌에 온 이튿날 봉변을 당하였다. 이들 5명은 손바닥에 쇠줄을 꿰인채 이도구경찰분서에 압송되여 3일간이나 갖은 악형을 다 받다가 구산(邱山) 웃 공동묘지골에 끌려가 살해되였다.》
여러모로 확인해보니 황옥순의 말은 옳았다. 다만 5명중 잘 모르겠다는 남자가 사실은 녀성으로서 화룡현 용화(勇化)출신의 유격대원 천국선의 안해로 나타난것이다. 안학선은 원 삼도구위 제1임서기이고 리명배는 적위대원이고 어랑촌단지부서기였다. 개구에서 왔다가 끌려가 희생된 두 녀인은 모두 20여세의 녀성으로서 그중 하나의 별호는 《노랑저고리》로 알려졌다.

부상당한 동지들:
이날 부상당한 사람으로는 여럿으로 나타나는데 이르과 신분이 알려지는것은 김병수(金炳洙)와 김정한이다. 김정한은 당평강구위 선전부책임자인데 옆구리에 부상당한데서 샘물골 유격대병원에 가서 한동안 치료를 받았다.
김병수는 중공평강구위 제7임서기였다. 그날 구위간부실을 나선 그는 구위의 간부와 군중들을 이끌고 서산쪽을 바라고 포위를 헤치다가 신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에 앞서 한 동지가 적탄에 맞아 비칠거리였다. 김병수는 날래게 달아가 그 동지를 부축하여 산에 올랐고 사람들을 만나서야 풀썩 주어앉았다. 그는 이미 신다리에 부상을 입은 몸이였다.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 원 김세렬사묘소와 기념비자리를 새로 꾸미게 되면서 김세렬사묘소 비석은 이렇게 ...
1982년 11월 13일에 필자는 팔가자에 가서 팔가자 가공공장의 공장장으로 일하는 김병수의 아들 김씨를 만나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날 부친은 신다리에 관통상을 입고도 부상당한 사람을 업기도 하고 부추키기도 하면서 산에 올랐다고 한다. 동지들을 만나서야 그 동지를 넘겨주고 집으로 왔는데 그때 우리집은 충천구(冲天沟)에 있었다. 장인강(长仁江)에서 배기지 못하여 1932년 겨울에 옮겨앉았는데 다섯세대가 사는 산간마을이였다.
집에 있은 나날에 부친은 갓난 딸애를 안고 달래면서 일곱살잡은 남동생과 그와 한동갑인 아들애에게 〈메데가(五一歌)〉, 〈추도가〉 등 항일가요를 배워주었다. 노래소리와 웃음소리는 가난한 살림에 활기와 이채를 더해주었다. 그 나날의 일곱살 아들애가 바로 나였다.》

화룡시 동쪽 변두리에 일어선 "십삼용사기념비" (자료사진)
이날 알려지는 부상자가 또 하나있다. 강씨(姜氏)라고 하는 사람인데 총여덟발을 맞았다하여 별명이 《빠련장》으로 불려졌다. 이외에도 필자는 《어랑촌 13용사전투》를 둘러싸고 숱한 항일투사들과 김세렬사의 딸 김영숙(金英淑) 등 여러유가족들을 방문하면서 많고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 꼭 알리고싶은 이야기는 당년 농현(현농민협회)부녀부책임자였던 고창일(高昌一)에게서 들은 말이다. 필자는 고창일할머니를 80년대 초에 백성시(白城市)에서 만났는데 그의 한마디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말도 마오. 그날 서쪽산을 바라고 닫는데 목에서는 진짜 겨불내가 났소. 흰옷입은 사람들이 많았소. 녀성들은 모두 치마저고리 차림인데 치마가 나무가지들에 걸려 째여져서 너덜너덜 거리고 팔소매가 떨어지고 내가 입은 치마 아래기슭에는 탄알구멍까지 여러개였다오. 그래도 목숨은 질겨 살아는 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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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볼수 있는 1933년 음력 1월 18일 어랑촌 13용사전투의 전후관계이다. 그날의 전투에서 우리측에서는 모두 16-17명이 희생되고 적들은 죽은자가 18명, 중상자가 20여명에 달하였다.
그날 해질녘에 9명유격대원들과 현위서기 최상동 등 동지들의 유체는 근거지 본부 서쪽의 삼굿에 모셔졌다. 동지들의 유체를 묵묵히 지켜보는 현위군사부장 방상범 등은 비분의 눈물을 쏟으며 두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였다. 동지들은 모여서서 울다가 헤여지는수밖에 없었다. 유격대에서 군악을 불면서 분위기를 조절하는데서 마음은 다소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날의 1소대 통신원 김창선이 1960년 5월 23일에 한 말이다.
2-3일후에 어랑촌근거지에서 150명좌우가 참가한 성대한 군민추도식이 거행되였다. 먼저 방상범군사부장이 현위를 대표하여 연설하면서 희생된 렬사들의 간력을 하나하나 소개하였다. 추도식에서 소개된 9명유격대원의 간력사항을 헤아리면 이러하다. 김세, 정위, 리구희, 류택규, 류만길 등 5명은 평강구유격대 출신이고 안흥원과 정두호는 삼도구유격대 출신, 리길원은 개산툰 유격대 출신이다.

김세ㅡ30살, 당원, 일명 김형걸(金亨杰) 연길현 동불사 요구(腰沟)사람, 원 평강구(平岗区)항일유격대 대장이고 현임 화룡현 유격대 대장, 어랑촌출신 후날의 화룡현유격대대 첫 대대장 장승환(张承焕,렬사)의 녀동생 장희숙(张姬淑,렬사)과 부부관계. 1927년에 태여난 귀여운 딸애를 동불사 요구 누구에겐가 맡김.
김아즈바이(金嫂)ㅡ28살, 당원, 별호아즈바이, 화룡현유격대정위. 룡정 어느 중학교를 졸업하고 평강구유격대에 참가. 이름은 모르나 조용하고 침착한 타입이여서 《아즈바이》라고 불리움.
리구희ㅡ22살, 당원, 별호 태평, 화룡현 장인강 출신이고 현유격대 제1소대 소대장. 1930년 여름인가 유격대에 참가하고저 장인강 물이졌을 때 마을 청년 둘과 함께 중국륙군대 셋을 업어 건네주다가 강에 처박고 총을 앗아낸적이 있음.
류택규ㅡ20살, 공청단원, 화룡현 이도구 수성촌 사람. 재건된 평강구항일유격대에 참가하고저 1932년 7월말에 약수동(药水洞)에서 공청단구위간부 황옥순에게서 고추가루와 주머니를 얻은뒤 밤에 약수동 공청단지부서기 김수억(金寿亿)이와 같이 어느 대지주를 기습하여 과수원에 나온 지주한테 고추가루를 치고 권총한자루, 보총한자루, 탄알 50여발 빼앗은 적이 있음.
류만길ㅡ22살, 단원, 화룡현 월청사 기신촌(月晴社岐新村)사람. 그날 총상을 입었지만 숨이 좀 있었음. 제때 치료하면 살가망이 있겠는데 놈들이 물러간 뒤여서 이미 늦었음. 희생.
정두호ㅡ19살, 공청단원, 화룡현 명신사(明信社) 우심 왕지동(牛心王智洞)사람, 원 삼도구유격대 대원.
김국진ㅡ24살, 당원, 그외는 알려지는것이 없다.
안흥원ㅡ22살, 공청단원, 별호. 젖먹이. 화룡현 명신사 원화동(元化洞)사람. 그날 체포되여 이도구에 끌려가 희생된 맏이 안학선의 동생. 5형제에서 셋째. 1932년 11월, 평강구유격대 리구희가 지휘한 장인강전투 때 적 기병들과의 조우전에서 용맹을 떨치였음.

화룡시 서성진 어랑촌에 설치되였던 안내 표지석 (자료사진)
오늘날 찾아볼수 있는 9명렬사의 이모저모이다. 군사부장이 렬사들의 간력을 말할 때 추도식은 삽시에 울음바다로 변하였다. 그 전날까지도 오락회마당에서 근거지군민들과 더불어 춤추며 노래하며 맘껏 뛰놀던 그네들이였으니 더욱 그러한가부다.
추도식날 연설에서 방상범군사부장은 우리 어랑촌에 《13용사》가 나타났다고 처음으로 정중히 선포하였다. 그 13용사란 《1.18》반격전에서 적들과 결사적으로 싸우며 근거지혁명군중과 동지들의 포위돌파를 엄호한 화룡현유격대 1소대 13명유격대원만을 가리킨다. 13용사중 김세 등 9명이 희생되고 채동식, 김준덕, 김만선, 천국선 등 4명이 방상범군사부장과 더불어 사선을 헤치고 나왔다. 죽지 않고 살아나왔다는 말이다.
마지막에 방상범은 13용사를 따라배워 근거지를 철옹성처럼 지켜가며 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자고 호소하였다. 이날 또 최상동서기와 9명유격대원을 따로 모시고 장중하게 장례를 지내였다.
ㅡ리광인 림선옥 저: 《이 땅에 피 뿌린 겨레 장병들》(전문이 실림). 민족출판사, 2007년 8월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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