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의 뒤안길에서 이 땅의 영령들을 찾아
李光仁 朝鲜族足迹
2024年10月22日 12:44

2017년 7월 29일 할빈에서, 한영남 씨 촬영
▣ 문학인생담 / 한영남
력사의 뒤안길에서 이 땅의 영령들을 찾아
―사학자 리광인교수와 만나다
(조선문 문학계간 "도라지" 2024년 제4호에서)

본문 작자 한영남 씨. 2017년 7월 29일 할빈 촬영
―지금 어디십니까?
―사천성 광안시에 있습니다. 나흘 뒤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네, 오늘은 강서성 서금에 왔습니다. 홍군의 발자취를 돌아보려구요.
―집이 아니시죠? 언제 쯤 돌아오십니까?
―한 보름 예산하고 나왔으니 아마 아직 열흘쯤 지나야…
내가 일이 있어 전화로 찾을 때마다 선생은 집에 계시지 않았다. 선생은 력사유적지를 답사하지 않으면 현지인들을 찾아 그들한테서 일말의 단서를 찾는 중이라고 했다. 집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를 뒤져도 얼마든지 편안하게 글을 쓸수 있으련만 선생은 모든 것을 자신의 눈으로 귀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도저히 배기지 못하는 ‘고집쟁이’이다.

그의 프로필에서 한대목을 옮겨본다.
리광인
1954년 3월 3일(음력) 길림성 화룡시 토산자 출생. 1972년 화룡2중(고중) 졸업. 1973~1978년 화룡현 국영 광평농장에서 근무. 공청단 서기, 농장 농업대 정치대장. 1978~1982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그후 연변일보사 편집기자, 연변력사연구소 연구일군 및 지방사연구실 주임,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학술교류부 부장 등 력임. 하해 하여 세상의 단맛 쓴맛 다 보다가 2006년 절강월수외국어대학 동방언어학원 한국어과 교수 력임. 연변작가협회 리사. 연변작가협회 절강창작위원회 주임 력임. 연변대학 재학시절인 1979년 《연변문예》 12월호에 조시 〈인삼장에서〉를 발표하며 문단 데뷔.
지금까지 인물전기, 평전, 력사기행, 항일이야기 및 문학연구와 평론 등 2000여만자 발표. 《홍군장령 양림》(2011년 중국작가협회 국가급정점작품지원 프로젝트), 《무정평전》(2013년 중국작가협회 국가급소수민족중점작품지원 프로젝트) 등 30여권의 저서 출판.
《홍군장령 양림》으로 연변작가협회 제1회 실화문학 대상, 평론 〈북향회와 강경애고문의 활약상〉(《연변문학》 2005. 11)으로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평론부문 본상 등 다수의 문학상 수상.

만남
1995년 삼년사이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작은 할머니와 작은 할아버지까지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나는 눈물범벅이 된채 부모님이 물려준 집을 처분하고 연길로 향했다. 누나네 집에 얹혀살면서 나는 책에서만 보아오던 수많은 시인, 작가들과 어울려 지내게 되였다.
어느날 지인의 소개로 술상에서 소개받은 분이 바로 리광인선생이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슬픔에 잠겨서 시를 쓴답시고 잔뜩 턱을 쳐들고 있던 나는 내앞에 앉아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는 분이 그토록 유명한 조선족 사학자 리광인선생이라는 것을 몰랐었다.
아무튼 그날을 계기로 우리는 꽤 자주 만남을 가졌고 신기하게도 만날수록 비슷한 점을 자꾸 발견하게 되였다.
둘다 술자리를 즐긴다는 것, 둘다문학에심취되여있다는것, 둘 다 하늘의별에 관심이 많아 대충 내뱉아도 성좌 2, 30개는 말할수 있다는 것, 둘 다 기막힌 생활고를 겪었다 는것, 둘 다 키는 작아도 단단하다는 것…
선생은 나보다 13살이나 이상이였으나 호형호제하자고 제의해서 나는 뜻밖에도 친인들을 떠나 보낸 허전한 마음에 형님 한분을 모실 수 있게 되였다. 그야말로 망년지교였다.
그렇게 우리는 즐거운 만남의 그래프를 그려갔다.
그러나 항상 세상살이가 여의치 않았던 나는 연길에 있는 작은 신문들에서 편집기자로 지내기도 하고 연변인민출판사《별나라》편집부에서 초빙편집을 지내기도 했으나 가방끈이 짧았던 나는 어디에서도 오래 배기지 못했다.
2004년 흑룡강신문사에서 편집들을 초빙한다는 소식을 지인한테서 듣고 바로 할빈행을 했던 나는 그대로 할빈에 주저앉았고 결국 오늘까지 내 할빈생활은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서로 떨어져 지내게 되면서 우리는 간간히 안부소식이나 전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늘 아쉬움으로 남군 했다.
2014년이였을 것이다. 음력설을 계기로 나는 큰 결심을 내리고 할빈에서 절강성 항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그 번 걸음에 절강성 소흥에 계시던 선생을 만날 수 있게 되였다.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선생이 모처럼 꺼내놓은 소흥 특산인 황주를 가운데 놓고 술잔을 기울이게 되였고 문학에 대해 인생에 대해 하늘의 별들에 대해 즐거운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였으나 소흥에 있는 로신의 옛집과 추근기념동상을 볼 수 있었고 월수대학 교정을 거닐어볼 수 있었다.
그때 선생은 그동안 한국어과교수로 계시면서도 자신이 우선 사학자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았다면서 휴일 같은 짧은 자투리시간을 리용해 소흥 주변은 물론 절강성부근을 답사, 수많은 귀중한 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례를 들면 신라시대의 유명한 스님이였던 김교각에 대 이야기와 우리에게 익숙한〈심청전〉의 주인공 심청의 사당이 바로 절강의 어느 섬에 있다는 것까지 온통 신기한 이야기들만 들려주었다. 나는 다시 한번 리광인교수를 우러러보게 되였다.

2017년 7월 29일 할빈에서, 한영남 씨 촬영
사학자 리광인
―지금까지 발표한 책들이 아마 서른권이 넘을 겁니다.
―아직 집필 중이거나 계획 중에 있는 저서들도 20권 남짓 됩니다.
―현지답사를 한 거리가 아마 해마다 지구 한바퀴 정도는 넘지 않을가 싶습니다.
사학자로서 리광인선생은 당년 홍군의 2만 5천리 장정길을 따라 현지답사를 하면서 수없이 많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생생한 자료들을 얻을 수 있었다. 사진기와 록음기와 노트북을 챙겨가지고 홍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현지인들을 만나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기록정리하고 현지의 당사연구소, 유적지들을 찾아 피와 살이 있는 숨쉬는 나라의 영령들의 숨결을 더듬어나갔다.
현지 방언들과 사투리들에 어리벙벙해질 때도 있었고 음식습관이 맞지않아 고생도 수없이 했으며 어떤 로정은 직접 두발로 걸으며 체험까지하느라 신발도 얼마나 구멍냈는지 모른다. 그러나 력사의 진실을 밝혀내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그 한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선생은 그 모든 간난신고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
가족의 만류도 지인들의 진심어린 권고도 세상사람들의 몰리해도 그의 불타는 열정을 꺾지 못했다.
피타는 노력은 그만큼 성과로 남게 되는 법이다.
평전《홍군장령양림》은 2012년 12월 민족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공동으로 출판.
평전《무정장군》은 2016년 4월 민족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공동으로 출판.
평전《백포서일장군》(2인공저)은 2015년 민족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공동으로 출판.
《최음파평전》은 2016년 6월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
《송몽규평전》(2인공저)은 2018년 3월 연변대학출판사에서 출판.
《시인윤동주인생려정연구》는 2015년 5월 민족출판사에서 출판.
《광복전겨레작가론》은 2015년 10월 연변대학출판사에서 출판.
인물전기《겨레항일지사들》(1~6권)은 2017년 10월 민족출판사에서 출판.
항일이야기《이 땅에 피 뿌린 겨레 장병들(항일편)》은 2007년 8월 민족출판사에서 출판.
《조선족력사문학연구문집》(1,2권)은 2006년 11월 한국학술정보에서 출판.
《중국조선족아리랑》(2인공저)는 2015년 5월 민족출판사에서 출판.
…
이와 같은 방대한 량의 저서들이 리광인선생의 손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탄생한 것이다. 이는 우리 조선족사회에 거대한 문헌적 사료적 기여를 한 것으로 되며 그중 많은 저서들은 사학계의 공백을 메운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전까지 양림 장군에 대한 연구는 한편의 전기가 고작이였다. 리광인선생은 10년 동안 중국 전 지역을 종횡무진하면서 당년 동만으로 불리우던 연변 각지와 남만의 반석지구, 상해, 곤명의 운남강무당, 광주의 황포군관학교, 북벌전쟁과 남창봉기, 중앙혁명근거지, 홍군장정길, 홍군동정과 황하기슭의 희생지 등 모든 곳들을 현지답사하면서 양림 장군 관련 자료수집에 최선을 다해 우리 조선족사회는 물론 중국에서도 잘 모르던 양림의 일대기를 생생하게 그려보였다.
《홍군장령 양림》은 이왕의 렬사전기 정리법과는 달리 자유분방한 수법을 기용, 단순한 렬사전에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족항일투쟁사로서 필요한 력사에는 부록을 달았고 책마다 문헌자료와 조사자료 등 출처를 밝힌 것이 눈에 띈다. 또 철저히 실사구시의 원칙에 따라 기술되였다.
《홍군장령 양림》은 비교적 높은 사학적 가치와 문학적 가치가 있다. 본 서는 많은 귀중한 력사자료를 발굴하고 문헌학, 사학, 문예학의 시각으로 양림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그의 금자탑의 위훈을 그려냈으며 국제주의 전사 양림의 사상전변과정과 인격적인 매력을 보여주었는바 창조성이 짙은 저서이다.
―김호웅. 2013년 10월 31일
저자는 《홍군장령 양림》에서 문헌적인 시야, 사학적 시야, 문예학의 시야로 자기의 독특한 분석과 평술을 구사했다. 평전은 아주 엄밀하고 재구성력과 창조성을 갖추었는바 력사문화의 고도에서 재심사와 사료재구성, 넓은 연구시야로 중국혁명사에서의 양림의 위치를 부각하였다. 총적으로 본 서는 문헌자료와 실지 현장탐방으로 제1인자의 사료를 수집하고 양림의 혁명발자취를 전면 고찰한 토대에서 걸출한 조선족혁명가, 군사가 양림의 빛나는 형상을 부각하여 이 면에서의 조선족혁명가의 공백을 메웠다.
―김관웅. 작가협회심사위원회총화발언에서
《홍군장령 양림》의 립전대상 양림은 중국조선족의 혁명투쟁사에서 력사가 가장 오래고 급별이 가장 높으며 중국혁명에 대한 공헌이 가장 큰 사람 중의 하나이지만 관련자료가 절대적으로 결핍한 상황에서 저자가 두 발로 뛴 간고한 현지잡사의 투혼이 돋보인다. 그리고 철저히 력사사실에 준하는 집필원칙은 진실성을 담보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평전 내지 학술연구에도 귀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기에 아주 큰 인식적 가치가 있다.
―리영애 《길림신문》(2013. 12. 26)
평전 《무정장군》은 도합 14개부분으로 나누어 역시 홍군장정에 참가해 살아서 섬북에 도착한 조선족가운데 한분인 무정장군의 일생을 사상 처음으로 그려보인 장장 45만자에 달하는 력작이다. 특히《무정장군》은 절대대부분 조선족사회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자료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리광인선생이 력사에 책임지고 력사의 고험을 이겨내려는 엄숙하고도 진지한 저술태도와 갈라놓을 수없는 장거라 할수있겠다.
《무정장군》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실사구시의 원칙에 따라 완전히 력사자료에 충실하였음이 보여진다. 그러면서도 평전은 그렇게 딱딱하고 메마르지 않으며 생활맛이 짙은 구수한 언어로 보는 이들의 심금을 사로잡으며 흥미진진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특점을 가지고 있다.
―류은종《무정장군》 서평.
《무정장군》을 읽으며 저자의 그처럼 방대한 자료수집과 조그마한 허구 한점마저 절대 용허하지 않으려는 지극히 학자적인 저술태도에 탄복했고 감탄했다. 또한 딱딱하고 메마른 자료집인 것이 아니라 생동하면서도 구수하게 진술되여 독자들이 심취되여 읽어볼 수 있도록 씌여졌으며 구구절절 오직 진실 하나에 의거한 충실한 평전이기에 우리 겨레 력사의 발자취에 길이 남을 수 있는 력사문헌으로 되기에도 손색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길림신문》(2016. 8. 3)
평전《백포서일장군》(연변인민출판사. 2015. 6)은 등 14개 부분으로 구성되였고 항일독립혁명가 서일장군의 일대기를 평전의 형식으로 그려 보이고 있다.
이 한권의 책으로 리광인선생은 국제쎄미나르에 참가해 여직껏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서일장군의 또 다른 이야기들을 피력함으로써 학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조선족사회에 그 이름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홍군음악가 최음파선생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하여《최음파평전》(연변인민출판사. 2016. 4)을 세상에 내놓았다.
최음파선생에 대해 《중국인민해방군음악사》(리쌍강주필. 해방군문예출판사. 2004. 12)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홍군음악가 최음파는 중국인민해방군 음악사상 첫 바이올린수이며 작곡가이다.
최음파는〈황하대합창〉, 〈생산운동대합창〉등과 같은 명곡을 남긴 작곡가 선성해거나〈연안송〉, 〈의용군행진곡〉으로 유명한 작곡가 정률성보다 훨씬 앞서 중국혁명에 투신한 로일대혁명음악가로서 섭이, 선성해, 정률성을 포함한 중국혁명음악가들의 선배라고 평가된다.
리광인선생은 수많은 거물급 인물들을 주인공을 평전을 쓴 성실하고 학자적인 사학가이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인 윤동주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시인 윤동주 인생려정 연구》(민족출판사. 2015. 5)라는 저서를 출판하였고 윤동주와 항상 함께 거론되는 인물인 송몽규를 정면으로 내세운《송몽규평전》(연변대학출판사. 2018. 3)을 내놓아 사학계와 문단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조선족사회에서 력사연구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꼽으리만치 적은 현시점에서 리광인선생의 이와같은 성과들은 더욱 빛을 뿌리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더 넓은 범위에서 알려지고 있다.

본문 작자 한영남 씨, 2014년 2월 2일, 절강 소흥 로신선생의 옛집을 찾아서
작가 리광인
력사연구에 몰입하면서 문학창작을 거의 놓게 된 리광인선생이지만 그의 문학을 향한 사랑의 불씨는 단 한순간도 꺼지지 않았다.
일찍 시창작으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력사연구를 진행하는 그 드바쁜 일정에서도 자투리시간들을 리용하여 수필창작을 해왔다.
〈‘꽃파는처녀’와 더불어 온 나날〉이라는 수필은 2005년에 《문학과예술》 잡지에 발표되였고〈구화산 련꽃향에 취하고 싶어〉라는 수필은《연변문학》(2009. 11)에 발표되였으며 수필〈친구가 가다니 믿을수가 없구려〉는 2011년《장백산》 잡지를 통해 볕을 보았다. 그리고조선족 저명한 사학자인 류연산선생이 돌아갔을 때 그는〈류연산―혈연의 강으로 가다〉라는 추모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수필과 평론들은 문단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고 평론〈북향회와 강경애고문의 활약상〉는 2005년 제26회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는 또 2009년에는 장편기행문〈장강남북에 남긴 옛 선조들의 발자취〉를 8회에 나누어 《길림신문》에 련재를 하기도 하고 2016년에 《길림신문》에 특별기고의 형식으로 장편기행문〈겨레홍군 장정 발자취 따라〉(35회)와 2017년〈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를 25회에 걸쳐 련재하기도 했다.
그 외 그는 연구문집인 《조선족력사문학연구문집》(1, 2권)을 2006년에 출간했다. 또 문단의 원로들마저 탄복해마지 않는《광복전겨레작가론》(연변대학출판사. 2015. 10)을 펴내 문단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광복전겨레작가론》에서 그는 해방전 동북땅에서 문필활동을 했던 최서해, 김창걸, 강경애, 윤동주 등 우리가 익히 아는 문인들을 상세하고도 구체적인 례문을 들어가며 피력했다.
이 저서에 대해 연변대학 김관웅 교수는 “다른 연구자들에게서 보기 어려운 생생한 연구자료로 묶어진 남다른 학술저서”이고 “광복전 우리 문학 연구의 큰 공백을 메운 우수한 학술저서”라고 평가하였다.
연변대학 전임교수 류은종은 “최서해, 김창걸, 강경애, 윤동주 등 해방전 조선족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가들이다. 이 책은 주요하게 해방전 중국에서 생활한 이런 작가들을 론하였다. 지난 세기 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그들은 조선, 한국으로 부터 중국에 와서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빛나는 한페지를 장식하였다. 해방전 조선족문학을 거론하는데 그들을 떠나서 거론할 수 없다. 작가는 이런 견지에서 오랜 기간의 연구를 거쳐 최서해, 김창걸, 강경애, 윤동주 작가를 연구대상으로 주요하게 상기 작가 혹은 작가작품들에서 아직연구가 미흡한 점과 쟁의가 있는 부분을 연구의 중점으로 다년래 력사연구에 종사하던 특점으로부터 출발하여 문학과 력사의 시각으로 쟁점을 론증하였다.”고 평가하였다.
2021년이라고 기억된다. 어느날 리광인선생이 문득 전화를 걸어왔다. 간단한 인사말이 오고간 다음 선생은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그 작사가 한윤호선생이 바로 영남이 삼촌이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생은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 기뻐서 소리쳤다.
―글쎄 내 언젠가 영남이한테서 그런 말 들은 기억이 나서 확인하느라 전화했는데 맞네.
그러면서 선생은 요즘 력사연구의 여가시간에 위챗계정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조선족의 홍색경전 2수의 노래를 둘러싼 글과 사진 및 동영상을 올리고 싶다고 하는 것이였다. 나는 낡은 사진첩을 뒤져 겨우 삼촌의 사진 두장을 찾아 선생한테 보내드렸다.
나중에 보내온 글과 사진들을 보니 선생은 력사연구를 하듯이 맨 처음 그 노래를 부른 가수를 찾아내고 중앙인민방송국에 소장되여있는 영상자료를 구해 멋진 작품을 탄생시켰었다.
선생은 위챗계정 ‘조선족발자취(朝鲜族足迹)’를 2017년부터 시작했고 역시 공중계정인 ‘적산진달래(赤山金达莱)’를 2020년에 시작해 지금까지 도합 1000여 편의 작품을 출범시켰다고 한다. 특히 한윤호(〈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와〈붉은 해 변강 비추네〉의 작사자 필자의친삼촌)선생의 홍색경전 2수를 둘러 싼 영상물은 그 조회수가 무려 20여 만차에 달하리만치 전국범위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때로는 저토록 작은 몸집에서 어떻게 그토록 끊임없는 정열과 열정이 샘솟듯 솟구칠가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한다.
글의 말미에
누군가에게는 그저 가물가물하게 잊혀져가는 옛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아리송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이름모를 사람에 대한 한토막 추억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라져가는 력사의 편린들을 파헤쳐 세인들에게 력사의 진실을 알리고 잊혀져가는 겨레의 영령들의 진실된 모습을 밝혀내기 위해 불철주야 로심초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오래된 어떤 편지, 찢어진 일기장, 또 누군가의 기 억속에서 끄집어낸 매우 짧은 이야기 한 대목에서도 실마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과학수사대마냥 끈질기게 추적하고 고고학자마냥 전문적인 분석을 거치고 작가마냥 세련된 언어로 정리를 해서 세상에 공개하군 한다.
사람들이 스팀이 잘된 따스한 방안에서 집식구들과 단란히 모여앉아 웃음꽃을 피울 때 그들은 한창 어느 답사길에서 차가운 눈 한줌으로 마른 목을 추기며 길을 재촉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에어컨으로 여름의 무더위를 느끼지조차 못할 때 그들은 그 삼복염천의 불볕더위를 헤치며 어느 농가에 들려 파파 늙은 할아버지와 무릎 맞대고 땀벌창이 된 채 력사의 한 대목을 고증하느라 흐르는 땀을 훔치는 것마저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종래로 세상의 영예판이거나 공훈메달 같은 것을 넘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칫 력사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질번한 사람이거나 사건에 앵글을 맞추고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 진실을 까밝히는 것을천직으로 여긴다.
바로 이런 성실하고 력사적 사실에 진심인 사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우리의 력사는 조금씩 조금씩 보완되고 보다 력사적 진실에 근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대오의 맨 앞장에는 사학가이며 작가인 리광인교수가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2014년 2월 2일, 절강 소흥 월수외국어대에서 우리 만나
2024년 10월 22일, 위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