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주은래와 양림의 진지한 인연
李光仁 朝鲜族足迹
2018年01月08日 09:00 听全文

황포군관학교 시절의 주은래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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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7월, 중공만주성위 군위서기 양림은 중공중앙국 서기이며 중앙쏘베트 로전(劳战)위원회 주임인 주은래의 부름을 받고 동북을 떠나 상해를 거쳐 강서 중앙쏘베트구역에 들어갔다. 그러나 최근 년간의 양림관련 글들은 양림이 상해를 거쳐간것이 아니라 당의 부름을 받고 상해로 먼저 갔다고 서술하고있다. 그중 한편의 글은 1932년 여름 사업을 회보하기 위하여 상해로 갔다고 하고, 다른 한편의 글은 명령을 받고 상해에 가서 군사회의에 참가하고 회의후 강서 중앙쏘베트구역으로 파견되였다고 쓰고있다. 많은 글들은 이 설법을 따라 양림은 상해에 가서 군사회의에 참가하였다면서 간단히 스쳐지나고있다.
그때 상해는 중국공산당 림시중앙의 소재지이고 주은래가 림시중앙의 일상사업을 맡아보고 있었다. 주은래는 1928년 6월 쏘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새로운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으로, 그뒤 열린 6기1중 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여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비서장 겸 중앙조직부 부장 중책을 짊어지다가 상해 중공중앙의 일상사업을 지도하고 있었던것이다.

홍군시절의 주은래 (사진자료)
그러던 1931년 6월 21일, 중공중앙총서기인 향충발(向忠发)이 주은래의 거듭되는 권고에도 마다하고 스스로 상해의 음페처를 떠나 밖에나가 잠을 자다가 이튿날 적들에게 체포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주은래는 즉시 구출작전을 내밀었으나 향충발은 체포되여 3일만에 반변하고 주은래의 비밀지점을 불어댔다. 주은래와 등영초는 인차 비밀지점을 옮겼기에 체포되지는 않았으나 적들이 미쳐날뛰는데서 바깥활동을 할수 없었고 상해에 머무르기도 어려웠다. 이런 형편에서 당중앙은 주은래가 상해를 떠나 중앙쏘베트구역으로 전이하도록 하였다.

중앙쏘베트구역을 중앙혁명근거지라고도 한다. 1931년 12월 33세의 주은래는 지하교통원의 안내하에 다년간 활동하던 상해를 떠나 영국 양향(洋行)의 소륜선에 올라 향항을 거쳐 산두로 갔고, 산두-대부(大埔)-복건 영정(永定)유격구-복건 장정(长汀)을 지나 12월 말에 끝내 중앙혁명근거지—강서 서금에 도착하였다. 서금에 간후 주은래는 중공쏘베트구역 중앙국서기,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 홍군총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6월 장개석은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해 제4차 “포위토벌”을 발동하였다. 이에따라 1932년 7월 7일,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는 “로동과전쟁위원회 건립”(建立劳动与战争委员会) 제6호 명령을 내리면서 “특별히 인민위원회 아래에 로동과전쟁위원회를 설립하여 혁명전쟁에 관한 모든 군사상, 경제상, 재정상, 로동상의 동원사항(事宜)을 계획하고 지휘한다. 주은래, 항영, 주덕, 등발, 등자회 등 5동지가 로동과전쟁위원회 위원을 맡으며 주은래동지를 주석으로 한다. 이후 전쟁동원에 관계되는 각항문제는 이 위원회에서 인민위원회 산하의 각부위를 지휘한다. 이에 특히 명령을 내리며 다같이 명령을 준수하기 바란다.”고 반포하였다.

양림의 부인 리추악 (사진자료)
보다시피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제6호 명령에 따라 “로동과전쟁위원회”가 조직되고 책임자들이 임명되고 책임범위가 확정되였지만 이 위원회를 맡아 구체적인 일을 할 사람이 있어야 했다. 이에 전쟁과로동위원회 주석 주은래는 선참 중공만주성위 군위서기를 맡은 양림을 생각했고 중공만주성위와 상해의 림시중앙의 지지로 양림을 중앙쏘베트구역으로 불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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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7월 양림은 상해를 떠나 배편으로 광동 산두로 갔고 주은래동지가 통과한 산두-대부-장정 지하교통선을 따라 적점령구인 국민당의 봉쇄선을 헤치며 강서 서금에 이르러 주은래를 찾았다. 주은래는 양림을 만나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몇해만이던가, 광주를 떠나 북벌전쟁, 남창봉기를 거친것이 1927년 8월이니 벌써 근 5년만이다. 주은래는 즉각 양림을 로동과전쟁위원회 참모장으로 임명하며 두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조선인 양림에 대한 주은래의 절대 믿음이였다.

대학교에 다니는 딸애 설이와 함께 당년 중앙혁명근거지 홍색수도 서금의 엽평을 찾아
로동과전쟁위원회(략칭 로전위원회)는 상기 제6호 명령에서 보다시피 “혁명전쟁에 관한 모든 군사상, 경제상, 재정상, 로동상의 동원사항을 계획하고 지휘”하는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정부 산하 전문위원회로서 중앙쏘베트정부내 경제, 군사, 로동 면에서의 모든 동원사업을 관리하며 전쟁동원에 관한 정부의 각 부와 위원회, 군구, 지방정부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여야 하기에 할일들이 얼마인지 모른다.
양림은 우선 주은래 후방공작의 강유력한 조수였다. 그는 주은래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군대와 인민군중을 동원하여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한 국민당의 제4차 “포위토벌”을 분쇄하기 위하여 불철주야로 사업하였다. 다음 양림의 주요책임은 혁명전쟁에 내세울 신병훈련과 신병보충이였다.

강서 서금 엽평의 홍군렬사기념탑
중앙혁명근거지 로전위원회 참모장으로 부임한 양림은 근거지의 홍군확대와 공고과정 실정을 헤아리는 가운데서 자기 어깨에 놓인 책임의 중요성과 긴박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마침 중화쏘베트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국민당의 제4차 “포위토벌”에 대비하여 “무릇 주력홍군을 확대하기 위하여 보내는 로농전사에 대해서는 부대를 정돈하여 전방으로 보내는데 편토록 하기 위해 모두 보충퇀의 집중훈련을 거쳐야 한다.”고 로전위원회에 지령을 내리였다.
이 지령과 더불어 양림은 또 중국로농홍군 제1방면군 보충사 사장을 겸하였다. 제1방면군 보충사는 전문 포로병사를 훈련시켜 주력병퇀을 보충하는 책임을 맡은 사여서 보충사로 불리였다. 양림은 중앙집행위원회의 지령에 좇아 짧은 기간내에 10개 보충퇀을 조직하고 훈련시키는 일에 달라붙었다. 양림은 총교관이기도 하고 직접교관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신작치과 헌신적 노력으로 한패 또 한패의 신입전사들이 보충사의 집중훈련을 거쳐 주력홍군에 수송되였다.

1933년 2월 8일, 중공쏘베트근거지중앙국은 국민당군대의 련속되는 “포위토벌”에 대비하여 당의 긴급과업결의를 지으면서 “100만의 철의 홍군을 창조하여 제국주의국민당군대와 작전하자.”를 첫번째 과업으로 내세웠다. 결의는 또 반드시 신속히 로전위원회의 결정에 좇아 적위대, 소선대의 개편을 끝내야 한다, 20만단의 량곡을 빌어 혁명전쟁을 도우며 3.8부녀절 이전에 부녀군중들을 발동하여 5만컬레 짚신을 만들어 전방에 보내야 한다, 다리를 수리하고 길을 복구하는 등 일들을 군중들을 동원하여 2월말 이전에 끝내야 한다 등 허다한 구체과업을 제시하였다.
로전위원회의 사업범위는 몇배로 늘어났다. 로전위원회의 일은 바로 양림이 구체적으로 책임지고 지도해야 하는 일이였다. 양림은 “100만의 철의 홍군창조”과업을 심장으로 받들어나서는 한편 중앙혁명근거지의 각급 정부와 부문들을 지도하면서 군중을 불러일으켜 길닦이를 하고 다리를 놓으며 불철주야로 뛰고 또 뛰였다. 따라서 근거지의 부녀군중들을 널리 조직하여 5만컬레 짚신만들기를 힘있게 내밀었다.

서금 사주패의 모택동의 옛집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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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림과 동지들의 노력으로 1933년 5월에 이르러 중앙혁명근거지의 새홍군전사가 근 2만명이나 늘어났다. 전선을 위한 길닦기와 다리놓기, 홍군짚신 만들기도 성과적으로 추진되였다. 이에 앞서 중앙혁명근거지에서 제2기 “혁명전쟁공채”(1932.11) 총액 120만원을 발행하자 동지들과 더불어 그 전부를 발행하는데 최선을 다하면서 제4차 반《토위토벌》에 쓸 단기비용 60여만원을 추가로 모으기도 하였다.
주은래동지가 양림을 중앙혁명근거지로 소환하고 로전위원회 참모장으로 등용한것은 현명한 조치였다.양림이 쏘베트중앙국과 주은래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한데서 중앙혁명근거지의 모든 후방공작이 새로운 면모로 질서있고 성과적으로 추진되여갔다. 1933년 3월 장개석국민당의 제4차 “포위토벌”을 짓부신후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로전위원회를 총병참부로 개칭하였다. 총병참부는 홍군의 총사령부, 총정치부, 총참모부와 더불어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직속단위였다. 양림은 계속 총병참부 참모장으로 뛰였다. 로전위윈회 참모장의 또다른 부름이였다.

서금 사주패의 모택동 옛집 앞 아름드리 장나무
1933년 그 시절 양림은 또 홍군 제1방면군 1군단 참모장으로 승진하여 중앙혁명근거지와 홍군부대에서의 양림의 지위와 역할이 보다 커졌다. 홍군 제1방면군 제1군단 참모장은 군급이상 군직으로서 양림 생애의 최고군직으로 홍군력사의 빛나는 한페지로 남아있다. 더구나 월감군구 소속 홍22사와 같이 1933년 5월, 중국로농홍군 총부(홍제1방면군 총부이기도 하다)가 설립되면서 (주덕이 총사령이고 주은래가 총정위이다) 홍1방면군의 모든 소속부대를 정돈하며 군편제를 일률로 사편제로 축소할 때 양림은 사장도 아닌 군급을 뛰여넘는 군단 참모장으로 승격하니 조선인 양림을 다시다시 보게된다.
양림이 월감군구 사령원으로 활동하다가 홍1군단 참모장으로 승격한것은 1933년 5월의 일. 홍1군단은 산하에 군으로부터 사로 편성된 제1, 제2, 제3 세개사를 두었으니 군단장에 림표, 정위에 섭영진, 참모장에 양림(필사제), 정치부주임에 라영환, 후임에 리탁연(李桌然),정치보위분국국장에 라서경이 부임되였다. 양림은 림표, 섭영진을 군단장과 군단정위로 하는 제1군단의 참모장이였으니 1933년 그 시절에 벌써 홍군부대의 흔치않은 외국적(조선적) 고급 홍군장령으로 자리매김했다. 먼저 시기의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병참부 참모장과 더불어 양림 홍군생애의 절정을 이루는 대단히 파격적인 승진이 아닐수 없다.

서금 사주패의 옛 우물자리 기념
중앙혁명근거지에서의 양림의 활동, 더우기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정부 로동과 전쟁위원회(로전위원회) 참모장,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병참부 참모장, 홍군 23군 군장, 월감군구 사령원. 홍군 제1방면군 1군단 참모장으로서의 홍군고위장령 활동은 모택동과 주은래, 주덕 등 중앙령도동지들의 뜨거운 사랑과 친절한 배려, 우정의 산물이였다. 세상이 널리 아는 주은래와 양림의 진지한 우정은 10년 세월을 거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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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초에 양림은 우수한 성적으로 운남강무당을 졸업하고 광주의 황포군관학교로 달려갔으며 황포군관학교 교련부(教练部) 학생총대에 배치를 받았다. 양림으로 말하면 황포군관학교는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시절로서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주임인 공산당원 주은래의 보고와 연설을 자주 들으며 중국공산당의 주장을 심장으로 받아 들이였다. 주은래와의 리해와 우정의 시작이고 주은래를 믿고 따르게 된 시절이라 하겠다.

황포군관학교 옛 사진 (사진자료)
1925년 2월초에 황포군관학교의 학생들이 동정군 정치부주임 주은래의 친솔하여 제1차동정에 참가할 때 양림은 주은래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학생군 제3기학생대대 제4대 상위대장으로 200여명을 거느리고 동정에 뛰여들었다. 동정의 목표는 진형명반동세력 소탕이였다. 양림은 학생군과 더불어 진형명반동세력을 소멸한뒤 6월에는 또 주은래를 따라 광주에 돌아와 운남, 광서 군벌 양희민, 류진중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였다. 한데서 양림은 주은래의 받들림으로 1925년 6월경에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이해 11월에 광동 조경현에서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퇀이 정식으로 건립될 때 양림은 주은래와 중공광동구위의 파견으로 독립퇀 제3영 영장 겸 당소조장을 맡아 나섰다. 엽정을 퇀장으로 하는 독립퇀은 중국공산당이 직접 지도하는 한갈래 혁명무장이였다.

2007년 5월 19일, 황포군관학교 정문입구 모습
1926년 4월 양림은 당조직의 지시로 “중산함사건”이 금방 터진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고 주은래동지의 두리에 굳게 뭉쳐 학교내 반혁명우파세력의 진공을 단호히 배격하였다. 이 모든것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후에 남창봉기 시절 주은래는 남창봉기의 중공전적위원회 서기였다. 양림 등을 선두로 한 수십명 조선인들의 남창봉기 참가는 주은래에게 보다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1924년 6월 16일 황포군교 개학식에서 연설하는 손중산선생 (사진자료)
황포군관학교 시절과 남창봉기 시절, 주은래와 양림의 진지한 우정, 이런 우정은 1932년 여름 중공만주성위 군위서기 양림을 강서 중앙혁명근거지로 불렀다. 그때 주은래는 중앙쏘베트근거질를 지도하는 중공중앙국 서기 겸 중화쏘베트공화국 로전위원회 주임이였다. 주은래는 중앙혁명근거지에서 조선인혁명가 양림을 뜨거이 맞아주고 포옹하면서 양림을 자기가 직접 지도하는 로전위원회 참모장으로 내세웠다. 1932년 여름부터 1934년 1월에 이르는 1년 남짓한 기간 양림은 주은래 후방공작의 견실하고 충성스런 조수였다. 이 기간 중앙혁명근거지에서의 일련의 홍군고위장령 군직도 주은래의 직접적인 사랑과 배려였으니 주은래는 또 모택동과 상의하고 양림을 곧 열리게 되는 중화쏘베트공화국 제2차전국대표대회에로 불렀다

李秋岳所属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 녀성대 합영사진 (사진자료)
1934년 1월 21일부터 2월 1일 기간 중화쏘베트공화국 제2차전국대표대회가 서금 사주패 대례당에서 성대히 열리였다. 2차대회에 참가한 정식대표는 693명이고 후보대표는 83명, 그외 허다한 방청대표. 모택동이 개막사를 드렸는데 홍군 제1방면군 제1군단 참모장으로 활동하는 양림이 정식대표의 한사람으로 대례당에 들어섰다. 2차대회는 나중에 대회일정을 마무리며 모택동, 주은래, 주덕, 류소기 등 175명 중앙집행위원과 등자회(邓子恢), 강극청 등 36명 후보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하였는데 양림은 175명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이였다. 양림은 중국공산당과 홍군의 수령인물들 속에 섞이며 윁남사람인 홍수(洪水)와 같이 두사람뿐인 외국적혁명가로 중국공산당의 중앙정치무대에 등장한 중국공산당의 한 력사인물로 떠올랐다.

중화쏘베트 2차대회가 열린 서금 사주패의 중앙정부 대례당
ㅡ2018년 1월 7일 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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