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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몽규 시 2수

太昊 2024. 11. 9. 12:53

오늘에 전해지는 송몽규 시 2수
李光仁 朝鲜族足迹
2017年12月09日 09:00 听全文


오늘의 윤동주-송몽규 생가 모습 (2016.8.26 현지촬영)


1

서울 연전에 입학한 1938년 4월이후 시인 윤동주는 이 해에 “새로운 길”을 비롯한 8편의 시, “산울림”을 비롯한 5편의 동시, “달을 쏘다”라는 산문 1편을 써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서울 연전 문과 1학년 시절이다. 윤동주의 고종사촌인 송몽규도 시작품이 적지 않으려만 지금까지 알려지는 시는 두세수가 고작이여서 이해 1938년 9월 12일 “조선일보”에 발표한 “밤”(夜)이란 시 한수가 신선하게 안겨온다.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밤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도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보며 휘파람 분다

명동촌에 복원된 송몽규 고향집 (2016.8.26 현지촬영)

  송몽규의 이 시는 초학자의 시가 아닌 비교적 세련된 시로서 일제치하란 이 험악하고도 참담한 어둠시대 속에서도 오직 저 하늘의 찬란한 별을 보면서 나아가겠다는 소신을 잘 표달하고있다. 바로 어둠과 별이란 이 시적 대조속에서 홀로 험한 산길을 걷는다는 그 자체가 아주 의미롭다. 밝아올 새날을 바라는, 시인이면서도 항일독립운동가이기도 한 송몽규의 진솔한 마음의 발로가 아닐수 없다.

그후 송몽규의 시작품은 보이지 않다가 이들이 졸업반 때 발행된 잡지ㅡ1941도 판 “문우”지에 시 “하늘과 더부러”가 꿈별이라는 필명으로 게재되여 흥분을 몰아오고있다.  


    선바위 서남쪽가에서 (2016.8.28 현지촬영)

송몽규와 윤동주로 말하면 1941년은 서울 연전 문과 4학년 시절로서 윤동주는 이 한해에 시 16편, 산문 1편을 써냈다. “눈 오는 지도”, “돌아와 보는 밤”, “또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시간”, “십자가”, “눈 감고 간다”, “또 다른 고향”, “길”, “별 헤는 밤”, “서시” 등이 그러하다. 이런 시들에 나타난 어둠과 밝음이란 명암의 대비, 밝아오는 새벽과 아침, 길 등 함축된 시어로 새 생활, 새 시대를 바라는 시인의 강렬한 감정이 그대로 흘러서 깊은 인상을 안겨준다.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로 받들리는 “서시”와 “별 헤는 밤”은 보다 강렬하게 가슴을 친다.

윤동주가 이러하다면 송몽규는 어떠했을까, 이제 이어지는 “문우” 부분에서 펼쳐보이지만 “하늘과 더부러” 달랑 한수밖에 보이지 않는다. 송몽규가 정말 한수밖에 쓰지 않았을까? 그런것 같지는 않다. 시인으로 불리우는 몽규의 시는 시공부를 엄청 많이도 한 세련된 시로서 시적재능이 남달리 뛰여난다. 그런 시들이 어디로 갔을까, 아직은 보이지 않으니 수수께끼이기만 하다.


    선바위 북쪽가에서 (2016.8.28 현지촬영)

송몽규랑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 연전 문과학생회인 문우회의 문예부에서 발행하는 잡지가 있었다. 이들 문학동아리들의 잡지로 1932년에 창간되기는 하였지만 몽규의 입학동기생인 유영씨는 “1941년도 판” 하나밖에 보지 못하였다고한다. 창간후 꾸준히 간행되지 못하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유일”한 1941년도 판 “문우”(1941년도 판 “문우”지는 6월 5일자 발간으로 되여 있다) 는 송몽규의 직접적인 소행이였다.


“문우”의 편집 겸 발행인은 문우회장인 강처중이고, 송몽규는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면서 1941년도 판 “문우”편집을 직접 맡아나섰다. “발행후기”도 당연히 몽규가 썼다. 송몽규는 “발행후기”에서 페간후기를 담당한 자기의 복잡한 심경을 응축된 글속에서 밝히기도 하였다. 원문은 당시 시대를 반영한 일본어문장으로 되여있고, 일본 도꾜 가꾸게이대학 리수경선생이 번역하였다.

선바위 정상서 장재촌(길 동쪽 마을)과 명동촌(길 남쪽마을)이 보인다(2016.8.28 현지촬영)

  원고에다 광고에다 검열에다 교정에다...도저히 2ㅡ3명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느꼈다. (중략)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후략)

(原稿やら、広告やら、検閲やら、校正やら・・・・・・とても、二三人の手に依るべきでないことをつくづく感じた。(中略)この雑誌を受け取る人々は、内容の貧弱、編集のまづさなどのために顔をしかめるだらう。然し、これは若い、経験のない学生達の手によって出来上ったものであると云ふことと、東奔西走して、かき集めた原稿の大部分が載せられなかったことを諒解してもらひたい。国民総力運動に統合して、学園の新体制を確立せんがために、文友会は解散するやうになる。そして国民総力学校連盟は徹底的に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うになる。そこで、交友会の発行としては、これが最後の雑誌になるわけである。然し雑誌発行の事業は連盟に継承されて、もっといい雑誌が出るだらうと思ふ。我々は新しきものへの合流を喜び且つそれへの尽力を誓ひながらこの最後の号を送る)(後略))

장재촌 너머 오봉산이 안겨온다 (2016.8.28 현지촬영)

                                      2


“발행후기”에 보이는 이 글을 보면서 리수경선생은 아래와 같이 말하고있다.

이 내용을 읽다보면 문학을 사랑했던 그였기에 숱한 고생 속에 겨우 모았던 원고 대부분이 검열에 걸려서 게재 불가능이 되었던 사실과, 식민지 공간 속에서 총력전의 군국주의 체제강화로 인해 교우회 발행의 “문우” 최종호로 그들이 해산되지 않으면 안되는 억압속의 현실이 더더욱 서글프게 느껴졌음을 행간에서 엿볼수 있다.


천만지당한 일가견이다. 그러면서 리수경선생은 “문우”의 겉면에 그려넣은 삽화ㅡ강가에서 빨래하는 조선의 어머니 모습(엄달호 작)을 두고 그들 송몽규네가 보인 “마지막 저항”이 였다면서 나름의 분석을 남기여 보는 이들의 리해에 도움을 주고있다.


송몽규랑 어린 시절 뛰놀던 장재촌 동구 문익환의 고향집 옛터에서. 문익환선생의 딸 문영금, 문익환선생의 친동생 문영환과 함께 (2004.10.15 현지촬영)

이 삽화는 한민족의 어머니가 흘러가는 시대의 흐름(흐르는 강물)속에서 일제 강점기의 참혹한 지배통치행위를 빨래 방망이로 두드리는 터프한 모습으로 은유한 삽화라 할수 있다. “어머니”의 존재는 민족의 자존이고, 흐르는 강물에 군국주의 정책의 모순과 침략지배 속에서 파생하는 갖은 때를 씻어 내리는 정화작업을 하고있는 어머니 그림을 최종호에 장식했다는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조선의 소박한 그림처럼 보이지만 가장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은 저항을 보였다고 할수 있다.

필자는 리수경선생의 이 분석이 아주 마음에 들어 원문 그대로 인용하여 보았다. 일제놈들을 빨래 방망이로 두드려주고 강물에 씻겨내리는 송몽규네의 필사적 저항이 가슴을 치며 안겨진다. 항일독립운동가로서의 송몽규의 형상이 우렷히 떠오른다.


송몽규랑 뛰놀던 명동소학교 동기동창 김정우네 집ㅡ장재촌의 외딴집 “아방궁” 옛집 (1992.4 현지촬영)

“문우”잡지에는 또 서점과 양복점, 학교, 지정 운동구 판매점 등 광고가 실리고 서문에는 연전의 명예교장(총장)인 원한경(언더우드 2세)의 메시지가 게재되여 있다. 잡지에 실린 시는 한글로 표현되여 있지만 나머지 글들은 전부 일본어로 적히여 창씨개명과 조선어 사용금지 현실, 조선의 민간언론이 페간 당하던 당시 상황을 알리고있다. 송몽규가 “발행후기”에서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수 없었던 점을 량해 받고 싶다.”고 한것은 다시 말해 “고생스레 모았던 원고 대부분을 검열에 걸려서 게재 불가능”이였기 때문이다.


룡정우물가에 일어선 룡정지명기원지정천(龙井地名起源之井泉)  (2016.8.26 현지촬영)
                         
  3

송몽규가 맡아 꾸린 1941년도 판 “문우”지에는 몽규랑 졸업반일 때 발행된 잡지로서 연전 학생들의 시 7편, 동시 4편, 릴게를 번역한 역시 2편, 도합 13편이 한글로 수록되였다. 그중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1938.5.10)과 “우물속의 자상화”(自像画,1939.9)두편, 송몽규의 시 “하늘과 더부러”가 “꿈별”이라는 필명으로 게재되여 있다. 흥미로운 것은 송몽규가 자기의 이름 몽규를 우리 말로 “꿈별”이라고 풀어서 기재한것.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고 창씨개명이 강요되는 조선(한국)의 현실에서 송몽규의 피맺힌 항일정신이 그대로 빛발치는 시점이다. 그런 우리 말 이름에 “하늘과 더부러” 시는 어떠할까?


복원된 룡정 옛우물 (2016.8.26 현지촬영)

   하늘과 더부러

꿈 별

    하늘
    얽히어 나와 함께 슬픈 쪼각 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수있어 알수있어......

    푸름이 깃들고
    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별이 미소하여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 싶다.

    오오ㅡ하늘아ㅡ
    모ㅡ든 것이 흘러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사념들만 뿌려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의욕의 잔재만
    쓰디쓴 추억의 반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연인이 없어 고독스럽지않아도
    고향을 잃어 향수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ㅡ
    하늘속에 내 맘을 잠그고싶고
    내맘속에 하늘을 간직하고싶어.

    미풍이 웃는 아침을 기원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부러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기원하련다.

 박용일씨(왼쪽), 리광평씨 안내로 윤동주 룡정 옛집을 찾아서 (2014.8.14 현지촬영)

이 시에서 송몽규는 살아가는 일제치하의 시대와 자기의 마음을 시적화자로 “슬픈 쪼각 하늘”에 비유하면서 이 시대와 이 마음은 원래는 “온 하늘”이여서 푸름이 깃들고, 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별이 미소하는 세상이였다고 토로하여 본다. 그런데 일제 치하속에서 온 하늘은 쪼각 하늘로 변하면서 푸름이 깃들고 태양이 지나던 하늘이요 꿈마저 흘러가 버리니 “쓰디쓴 추억의 반추”만 남게 된다. 울음이 터진다.

그러던 시가 결말부에 이르면서 시적화자는 쓰디쓴 추억속에서 울음속에서일어서며 희망을 품어본다. 그 희망은 하늘속에, 내맘속에 잠그고 간직하면서 미풍에 웃는 아침ㅡ밝아올 조선(한국)의 광복을 기원한다. 그 광복의 아침에 너ㅡ하늘과 더불어 노래를 부르겠다고 맘속으로 기원한다. 시속의 시적화자가 바로 송몽규 자신이려니 일제를 몰아내고 광복의 새 아침을 바라는 시인의 심경이 고스란히 비끼였다. 이것이 바로 송몽규이고, 이것이 바로 송몽규가 나아갈 길이였다.

2017년 1월 18일 정리

룡정시 명성채색인쇄공장 자리가 윤동주 룡정 옛집터 (2014.8.14 현지촬영)


    룡정 은진중학교 옛터에서 (2014.8.14 현지촬영)


송몽규랑 다닌 복원된 룡정 대성중학교 (2007.8.29 현지촬영)

송몽규가 거닐던 남경 부자묘를 찾아 (2013.9.20 현지촬영)


    강소 의흥 룡지산 가까이 자리한 룡지산 첫 입구 (2013.9.14 현지촬영)

룡지산과 복원된 징광선사 한눈에 보여 (2013.9.14 현지촬영)

장재촌 동구어구 송몽규 옛 묘소 자리에서 (2004.10.15 현지촬영)

룡정 동산의 중앙교회묘지에 자리한 송몽규 묘소 (2016.8.26 현지촬영)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와 연변인민출판사 “중학생”편집부가 가진 활동속에 (2005.2.16 현지촬영)

룡정시 명동촌의 윤동주(1917.12.30-1945.2.16) 생가. 송몽규는 윤동주 보다 석달 먼저 9월 28일 외가인 윤동주의 집에서 태여났다. (2007.8.29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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