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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랑촌 글 뒤이야기

太昊 2024. 11. 1. 09:33

어랑촌 13용사 글 뒤이야기
李光仁 朝鲜族足迹
2017年10月12日 08:56 听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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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고고성을 터친 위챗 공식계정(公众号)ㅡ”조선족영렬”을 통해 “어랑촌 13용사 누구누굴까”를 두번에 걸쳐 올리니 뭔가 일이나 해낸것처럼 마음이 후련해난다. 이 글은 10여년전에 정리한 글로서 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저서 “이 땅에 피 뿌린 겨레 장병들”(항일편, 2007년 8월 출판)에 전문이 올라있다. 이 글이 처음 해볕을 보아 10년만에 위챗 공식계정을 통해 우리 조선족사회에 두번째로 알림은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연변대학 조문학부 재학시절인 1980년 여름방학 할빈 동북렬사기념관으로 달려갔다

지난 8월 3일에 우리 위챗동아리ㅡ “력사동네 민속동네”의 20여명 회원들과 관련기자들이 화룡시에 가서 그제날 약수동항일근거지와 어랑촌항일근거지, 청산리전적지 기념비 등을 현지답사한적이 있다. 그때 오늘 화룡시 서성진에 귀속된 원 와룡향 어랑촌구내 김세렬사묘와 “십삼용사기념비”찾으니 화룡시 관련부문에서 새로 확장수건하느라고 크게 파헤친 상황이였다. 13용사기념비와 그 주위를 새로 확장수건하는 현실이 그지없이 고맙지만 13용사 명단에서 이미 4명(그중 한명 빈이름)이 잘못되였는데 이를 이번에도 고착시키면 어찌하나하는 근심이 전신을 감쌌다.

그래서 어랑촌 현지에서 위챗동아리 회원님들에게 “어랑촌13용사”를 소개하면서 이 근심을 털어놓았다. 13용사의 진짜 함의는 1933년 음력 1월 18일 어랑촌 1.18반격전에 참가한 화룡현유격대원 13명을 가리킨다, 그날 반격전에 참가한 14명중 현위군사부장 방상범과 4명이 포위를 뚫고 나왔다고 말하니 일행 대부분은 화룡시 “십삼용사기념비”에 오른 13명을 13용사로 알았는데 그중 9명외는 사실이 아님을 처음 알았다면서 개탄을 금치 못하였다.


                         1980년 여름방학 할빈 동북렬사기념관에서

이들 개탄이 나에게 주는 충격이 컸나부다. 나는 여러 신문단위 출신 회원님들과 기자님들에게 앞으로도 어랑촌13용사 관련 글을 취급하거나 할때면 주의를 돌려달라고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다. 연변인민방송국 문체부 주임 남철씨한테는 어랑촌13용사 명단을 바로잡는데 힘써달라고 부탁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번의 화룡시 어랑촌 구내 13용사기념비 확장시에도 또 이전의 잘못된 명단을 그대로 새겨넣으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내내 가실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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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랑촌13용사 력사에 깊이 관여한 사람중의 한사람. 아마도 나 스스로 어랑촌13용사 연구의 제1인자라고 자칭하면 뭇사람들이 어떻게 볼지는 모르겠지만 제1인자는 1인자이니 아니라고 말할수 없지 않을까. 사실 처음 어랑촌13용사 연구에 깊이 관여한 분들은 내가 아직 대학생티를 벗지 못했던 그 시절에 이미 한다하는 어른 연구가들이였으니 그들로는 연변박물관 전임관장 김만석과 항일로간부인 량환준 그리고 연변력사연구소 권립 등 분들이였다.

김만석, 량환준, 권립 이분들은 모두 어랑촌13용사 글들을 써서 조선족사회에 알리는데 기여한 분들이다. 권립연구가의 타자고ㅡ“어랑촌13용사고(考)”는 지금도 이 글을 정리하는 나의 앞에 놓여있다. 그러나 량환준 외 두분의 연구시발점은 모두 13용사를 13렬사로 보았기에 어랑촌 1.18반격전에서 희생된 희생자들한테서 시선이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기에 희생된 화룡현유격대 9명 유격대원외 희생자들을 찾느라하다가 결국 현위서기 최상동 등 세렬사들도 포함시키지만 찾지 못한 한사람은 공석으로 남길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이분들은 연구시발점이 잘못되여 제대로 되는 연구결과를 가져올수가 없었다.


   대학졸업후 화룡현위 당사연구실 시절, 당사연구실과 현위판공실 분들과 함께

1982년 7월, 연변대학 78년급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중공화룡현위당사연구실에 배치되였다. 대학 재학시절에 이미 우리 조선족항일사에 대하여 일가견을 가진데서 그 시절 화룡현이라고 불리운 화룡시 항일사에 대하여 깊이깊이 빠져들게 되였다. 그때 연변주와 관련부문의 전문지시로 우리 연변주와 8개현의 당사연구실 연구일군들은 관련부문에 봉인된, 문화대혁명 기간의 전문문서로 작성된 근 1000권에 달하는 문서들을 모두 보게 되였다. 이런 전문문서들에는 화룡현의 항일사 면면이 그대로 흐르고있고, 어랑촌13용사 관련자료들이 많고많았다. 어른연구가들인 김만석이나 량환준, 권립 등 분들은 이런 귀중한 자료를 볼 기회가 없었으니 유감일수밖에.


               연변일보사 편집기자 시절, 정치생활부 기자분들과 함께



나는 전문문서들에 반영된 항일투사분들 선색에 따라 찾을수 있는 분들을 한분한분 찾아 전격방문하면서 다시 많고많은 이야기들을 직접 들을수 있었다. 그 시절 멀리로는 흑룡강성 해림에까지 찾아가 항일투사들을 방문하였으니 믿을수 없다던 전문문서의 내용들은 모두 사실임이 밝혀졌다. 이런 방문과정을 거치면서 나의 건의와 당사연구실, 현위의 비준으로 우리 화룡현위당사연구실에서는 화룡현 력사견증자들인 항일투사분들 10여명을 화룡빈관에 모시고 1982년 11월 3일부터 8일까지 전문 좌담회를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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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나는 연변일보사를 거쳐 연변력사연구소로 전근하면서 또 연구소의 통일배치로 몇몇 집필소 연구일군들과 더불어 “연변인민투쟁사”를 집필하게 되면서 연변당안관에 반년이상 날마다 출입하는 기회를 가지였다. 세상사람들이 잘 모르는 연변항일사 관련 거의 모든 자료를 뒤져볼 기회를 가지였으니 그런 자료들 중에는 어랑촌13용사 관련 당년 화룡현유격대 출신들인 김창선, 리동백 등 항일투사들의 지난세기 60년대 초반 구술자료들도 적지 않았다.

관련 전문자료연구와 현지방문, 좌담회를 통하여 나는 남모르는, 잘 모르는 그 시절 화룡현유격대와 어랑촌근거지, 어랑촌13용사의 모든 과정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되였다. 찾을수 있는, 볼수있는 범위내 어랑촌13용사 전후관계 자료들을 모두 보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같은 기회는 흔치않은 기회로서 나는 13용사 관련 자료연구의 유일무이한 행운아였다.


            연길백화 옆 원 연변검찰원 자리에 연변력사연구소 자리잡아

이밖에 짧디짧은 1년사이 현지방문자료만도 화룡현유격대 출신들과 근거지서 활동한 분들 10여명, 방문하지 못한 분들의 많은 증실자료까지 선후 20여명 증실자료를 손에 쥐게 되였으니 앞이 환히 보이였다. 그중에는 당년 어랑촌 13용사전투 때 핍박에 의해 룡정과 투도구, 이도구쪽에서, 화룡 삼도구 쪽에서 동원된 일본군수비대의 안내자로 나선 귀순자들도 5~6명 되니 그들은 토벌에 나선 일본군의 움직임을 손금보듯 잘 알고있었다. 이런 귀순자들은 워낙 어랑촌근거지에서 활동하다가 하산하여 귀순한 사람들이였다.

어랑촌13용사와 그 반격전에 대하여 완전 자신이 섰다. 용사는 렬사의미를 가질수도 있지만 아닐수도 있었다. 진실한 력사에서의 13용사는 랑아산의 5용사처럼 살아남은 사람들도 포함되는 전문용어였다. 이에 토대하여 나는 중공화룡현위당사연구실의 명의로 화룡현위에 올리는 전문보고서 초고를 썼고, 우리 당사연구실의 전문토론과 주임의 재정리를 거쳐 1983년 12월 20일에 중공화룡현위 상무위원회에 보고되였다. 미구하여 이 전문보고ㅡ “어랑촌13용사에 대한 초보탐구”가 현위의 비준을 받았고, 현위에서는 어랑촌13용사의 잘못된 명단부분을 바로잡기로 하였다. 이 결정은 1984년 초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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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4월 17일, 우리 화룡현위당사연구실에서는 이미 연변대학 박창욱교수와  여러분야의 력사부문에 통보한데 따라 하남 네거리에 자리한 연길시민족판점 508호실에서 연변박물관 김만석관장, 연변주 민정국 정과장, 당년 어랑촌 1.18반격전에 참가한 현유격대 채동식로인 등 분들이 참가한 소형모임을 가지였다. 소형모임에서 우리는 특별히 모신 채동식로인님께 로인님은 오늘부터 어랑촌13용사의 한사람으로 등장하게 되였다고 말씀드리였다.

그때 채동식로인님은 꿈만 같다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다. 그때로부터 장장 33년 세월이 흘렀으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채동식로인님의 그날 모습은 금시처럼 내내 잊혀지지 않는다. 너무도 생생히 안겨온다. 그 눈물은 13용사전투에서 희생된 자기 전우ㅡ9명 유격대원들에 대한 마음의 추모의 눈물이였으리라, 그 눈물은 해방후 내내 어랑촌13용사면서도 13용사 대접을 받지 못한 서러움에서였으리라, 그 눈물은 종내 13용사란 부름을 받으면서 당과 정부에 드리는 우러나오는 감사의 눈물이였으리라.


                  연변력사연구소 시절 연구소 선후배 동료들과 함께

그런데, 그런데 어인 영문인지 우리 당사연구실의 전문보고에 대한 화룡현위의 비준결정은 그후 실제로 집행되지 못하였다. 실제집행에는 경제문제 등 이모저모의 애로가 가로걸린 모양이다. 미루고 또 미루다가 지나쳐버렸으니 천만 유감이기만 하다. 그후 세월속에서, 세대 교체속에서 어랑촌13용사 시정사실은 점차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전문보고와 결정 과정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실정이다.

이 글은 여기까지 쓰고 그치려 한다. 나에겐 어랑촌13용사 관련 거의모든 자료가 있으며 어랑촌13용사를 두고, 어랑촌 13용사기념비를 두고 흘러온 지난세기 50년대 중반이후의 모든 과정이 기록되여 있다. 허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략하고저 한다.

그러면서 어랑촌13용사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잘못된 13용사의 몇몇 명단을 바로 잡는데 도움되였으면 하는 바램에서 이 뒤이야기를 한편의 글로 엮어보았다. 앞의 “어랑촌13용사는 누구누굴까”와 이 뒤이야기를 보는 이들은 이 전문 연구결과물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가를 잘 알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매 한편한편의 의미있는 겨레항일사 관련글들은 이런 피타는 연구과정을 거치면서 그 력사관련 앞뒤 모든것을 통할때만이 비로소 세상에 태여나게 된다. 그래야만 력사의 고험을 이겨낼수가 있다. 아니면 남의 농사를 자기 농사처럼 남의글 베껴내기식 글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ㅡ2017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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