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화단의 옥란꽃
중국중공민주당 당원, 공필화가
현채미에 대하여
림무웅 김재옥
현채미( 玄采薇)는 1912년에 상해에서 태어났다. 헌채미의 부친 현상건(玄尚健)은 조선 리씨왕조 말기의 프랑 소 주재한국대사였다.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합병한 뒤 민족심 있는 현상건은 일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프랑 스에서 중국으로 망명하여 왔다.
중국에 온 현상건은 프랑스 우 호인사의 소개로 상해 주재 프랑스상회 - <룡동 공사)의 지배인으로 임직되였다. 그때로부터 현상건은 조선에 있는 처자와 련계 가 끊어지고말았다. 조국으로 돌아갈 희망도 없었고 또 고독한 독신생활을 하기도 어려웠던 현상건은 친우들의 소개로 중국녀인 왕방군(王芳君)을 처실로 맞아들였다..
왕방군은 소주태생으로서 부친을 일찍 여인데다 형제 또한 여럿이어서 어려운 생활을 겪고 있는 가정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려고 외국인과의 혼인을 동의하였던 것이다. 그때까지만하여도 중국사람이 외국인에게 시집간다는 것은 리해할수도, 용서할수도 없는 일이었다. 왕방군 역시 뭇사람의 랭대와 친지친우들의 눈 총을 면치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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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미 자매와 동생 셋은 바로 이런 환경에서 태어났기에 학교에도 갈수 없었다. 뭇사람의 기시를 끼린 왕방군이 자식들 을 학교에 못다니게 했던 것이다. 왕방군은 가정교사를 청하여 자식들을 가르쳤다. 현채미의 부친 현장전은 골동품과 시화 등 문물에 각별한 흥취가 있었다. 현상건은 같은 취미를 가진 조선 친구 민원정과 가까이 보냈는데 민원정 역시 서화를 애호하였고 그림도 그렸 다
.민원정은 늘 회화작품을 가지고와서 현채미의 부친과 함께 감상하군 하였다. 그 때마다. 현채미는 그들사이에 끼여 그림을 감상했고 커서 그림을 그리는 꿈을 키웠다.
그런데 현채미가 14세되던 해에 부친 현상건이 세상을 뜰줄 이야. 현채미네 가세든 그때부터 점차 기울기 시작하였다. 끼니 도 제대로 이어대기 어려운데 언제 그림 공부를 생각할 여지가 있으랴. 현채미는 꿈을 고스란히 마음속에 간직하는 수밖에 없었 다...
그러다가 1946 년에 현채미의 그림공부 념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것은 1945년 일본이 무조건 투항한 후 국회에서 돌아 온 시인 서지마의 원 부인 - 장유의 (상해녀자은행 행장 장군매, 장가오의 녀동생)가 현채미의 취미를 알고 자기 아들과 함께 그 림공부를 하도록 해준데서 이룩된 소원성취였다. 하여 현채미는 서지마의 이종사촌매부이자 동제 대학교 건축원림 전문가였던 진종 주 (중국화예술대가 장대천의 제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회화를 배우게 되였다. 진종주는 아무런 보수도 요구도 없이 현채미에 게 그림그리기를 배워주었다.
고상한 성품의 소유자인 진종주는 현채 미에게 공필중채 등 회화지식을 남김없이 전수하여 주어 현치미로 하여금 점차 그림의 오묘함을 깨닫게 하였다. 분명 진중주는 현채미의 계몽선생이 였 고 현채미의 예술 창작성취 역시 진종주 선생의 가르침과 갈라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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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었다.
해방전쟁의 승리가 눈앞에 보일 때 혼란한 국세를 파악못한 장유의네는 또다시 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현채미와 상해탄에 서 규모가 작지 않은 음식점을 다른 사람과 합작하여 경영하던 남편 요소화는 해방을 기다렸다가 다시 보기로 하고 상해에 남 았다. 그런데 금방 해방을 맞고보니 현채미와 남편은 쌍쌍이 실 업자로 되고말았다. 생계를 위하여 현채미는 처음에 값가는 물 건을 팔았다. 후엔 팔 물건도 더 없게 되자 의학원의 림시공으 로 들어가 학생들의 교재용 그림 - 심장, 폐 따위를 그렸다.. 새 중국이 탄생된 후 정세가 안정되고 부녀들의 지위가 향상 된건 물론 소수민족도 자기의 정치권리를 행사할수 있게 되였 다, 현재미는
모든 우려를 털어버리고 전국인구보편조사에 자기 의 본 민족정씨 - 현씨 정을 다시 찾았다..
1955년 경 주은래 총리의 <지식 분자문제>에 관한 지시가 하달 된후 현채미는 중국농공민주당에 가입하였다. 뒤이어 문화부와 중국미술가협회에서 련합으로 조직한 제2차전국미술작품전람회때 현채미는 중국화 <합작화는 좋다>를 출품하여 입선되였고 전국 순회진람에까지 전시되였다.
1956년 손중산선생탄생 90주 년 기념전람회때 중국농공민주당 에서는 현채미를 전람준비사업에 내보냈다. 전람회가 결속된후 현채미는 중국농공민주당 상해지위원회기관에 전근되여 사업하게 ⁶
1960 년에 현채미는 중국농공민주당 상해지위원회 기관에 돌 아와 사업하게 되였다. <문화대혁명>과 <4인무리>의 극좌로선 때. 문에 현채미는 붓대를 놓지 않으면 안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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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4인 무리>가 끼꾸리진후 조직활동을 회복한 중국농 공민주당 상해위원회 지도부에서는 현채미를 상해 서회구중국중 공민주당조직건설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그다음해에 면바로 향항 문회보장간 3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는데 현채미는 중국화 <화기춘 무>를 창작하여 기념행사를 축하하였다. 문회보에서는 이 작품 을 해력서와 달력으로 출판하였다. 희랍 아테네에서도 이 그럼 을 해력 서와 달력으로 출판하였다.
1981년 , 상해시 문화국, 민족사무위원회, 미술가협회 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전 시 소수민족미술작품전람회때 현채미는 중국 화 <한림도>, <옥란산작>.< 피리소리에 붕황새 날아든다> 등 작 품을 출품하였는데 (옥린산작)이 1982년 전국 제 4차 소수민족미술 전람회에 추천되여 우수상을 받았다. 현채미는 북경에 가서 수 상식에 참가하게 되였다. 수상식이 있은 날 저녁 송경령부주석 이 지도하시던 대외선전외문잡지의 기자 고선생이 <옥탄산작>의 창작의도를 료해하려고 현채미를 찾았다. 현채미는< 화조화로 정치주제를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옥란꽃을 당의 상징으로, 순 결하고 깨끗함을 표현하려 시도하였다.> 고 솔직하게 내 심을 토 로하였다..
1984년 중국농공민주당 상해지위원회에서는 현채미에게 (3. 8붉은기수)칭호를 수여할 결정을 지었고 상해시문자연구관에서는 186 년에 현재 미를 관원으로 받아들였다
1988년에 현채미는 중국화( 옥 당번화도)를 창작하여 향항문 회보창간 40주년 기념 행사에 증정하였고 문회 보에서는 이 작품을 기념집에 수록하였다.
1989년 , 현채미는 중국화 두폭을 창작하여 아시아운동회 개 마식에 기증하였고 1990년 12월 엔 (옥당부귀도)를 상해시정치협 상회에서 주최한 전 시 각 민족 친선모임에 기증하여 대만동포 들에게 보내주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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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채미는 전시를 목표로 그림 몇폭을 한국에 보내기로 했는 데 여러가지 애로로 다만 <월간미술> 1992년 2월호에 실렸을뿌 이다. 이 일을 두고 본문 작자가 유감을 표시했을 때 현채미는 자기의 감구지회를 이렇게 토로하였다.
<원래 우리 집에는 민원정전생의 그림이 적지 않게 있었는 데 문화혁명때 몽땅 없어지고말았지요. 이 일은 늘 내 가슴에서 내 려가지 않고있어요. 내가 지금 그림을 몇폭 그려 고국에 보낼 기회가 있고 또 고국에 남겨둘수 있다면 사실 나에게 있어서는 말할수 없는 안위와 영광이 아닐수 없지요. > 우리 말을 한마디도 할줄 모르고 더구나 일생을 중국땅 상해에서 생활한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아직도 본 민족의 얼이 깨끗한 샘처럼 마를줄 모르고 살아 흐르고있다는것이 놀라운 일 이 아닐수 없다. 참으로 피줄은 속일수 없는가보다. 현채미가 창작한 불상화 <천수보살>이나 옛날 옷차림 인물 화 (춤추는 녀인도), <퉁소소리에 봉황새 날아든다> 등은 필치 가 부드럽고 고상하면서도 아름다운것으로 현채미공필화의 독특 한 풍격을 돋보여준다. 화조화화가로서의 허채미는 공필화조예가 대단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의 화조화에서 표현된 전통적 중국화의 수묵기법과 조선화의 우아하고 고귀한 고전적색조를 접한 현채미 의 화풍은 중국공필화계와 중국화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특별히 지적할바는 현채미가 중국 조선족화가들중에서 중국화전 통기법의 유일 계승자로 손색이 없다는 점이다
현채미는 일찍 중국화대가인 장대천의 직접제자 진종주의 지도밑에 중국화전통기법을 연구하였고 그후 다년간의 창작실천 에서 고전화법과 다른 자기의 풍격을 창조하여 전통울 진일보 발전시켰다. 헌채미화법의 주요드특점은 중국화전통필묵에다 조선 민족의 전통적심미의식을 조화지킨것이다. 이런 민족적심미의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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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색채에서 더욱 뚜렷이 표현되었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곡 정부위원장은 현채 미에게 <모사에서 창조를 보게 되고 실사로 진면모를 보여주다>는 제사 를 써주는것으로 그의 창작성과를 높이 평가해주었다.
현채미의 화조화 <대와 매화>, 꽃가지에 짙은 봄>.< 한림 도><, 봄은 사람의 뜻을 따르다> 등은 모두 구도가 빈틈없고 운 필이 치밀하며 선이 활달하고 형상이 생동하고 색채가 고상하면 서 아름다운 특점이 있다. 현채미는 그의 예술생애에서 중대한 체재와 들끓는 정치운 동을 취급하여 창작한적이 없다. 이는 그의 공필화 특히는 화조 화자체가 그 어떤 정치내용이거나 중대한 인생 철학을 취급할수 없기 때문이였다. 그는 회조화를 통해 자기의 감정 - 순결한 마 음, 깨끗한 정서, 정직한 기백을 표달했고 부강과 부귀, 장수 그리고 정의와 진보를 기원했다.
- 중국의 걸출한 녀류화가이며 덕망 높은 사회 활동가이신 현 채미는 80여 고령이지만 여전히 왕성한 정력으로 예술 창작과 사 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현채미는 우리 민족의 뽐낼 만한 원로화 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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