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제1대텔레 비죤사업일군
김민첩에 대하여
엄성흠
조국은 꿈에만 보네
떠나온지 몇십년인가
그래도 변할수 없는 마음
나의 넋 이여
몸에 걸친건 양장이다만
마음은 중국넋이다
선조들이 락인 찍어준
중화의 피여
장강 장성 황산 황하
내 맘속에 높고높은 기념비여라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운 땅이여
홍콩의 청년가수 장명민(张明敏)이 부른 <나의 중국심>은 뜨거운 조국애의 사상감정과 그에 맞는 격동적인 선률로 하여 텔레비죤관중들의 강렬한 공명을 불러일으키면서 1984년춘절련 환모임을 고조에로 끌어올렸다. 일시에 < 나의 중국심>은 억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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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 사랑을 받는 류행가곡으로 불려졌으며 참신한 형식으로 흥 미롭고 재치있게 꾸며진 1984년춘절 련화모임은 사람들에게 아름 다운 추억을 남겨주었다 - 이 열광적인 희열의. 물결속에 웃음소리. 찬탄소리. 축하소 리를 들으며 잔잔히 미소짓는 녀성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번 춘절 련환모임을 책임지고 조직한 김민첩감독이였다.
어려운 나날에
김민첩은 본명이 김명희(金明嬉)이며 1933년 5월 8일 흑룡 강성 눌하( 讷河 )현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는 눌하역전의 직 원이였는데 마음이 후덕고 매사에 참다왔다. 말하면 말한대로인 아버지의 성미는 후날 김민첩의 성격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 다. 어머니는 활달한 성격에 일솜씨가 날래고 글도 얼마간 볼줄 아는 가정주부였다. 일찍 김민첩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일본의 노예적예속에서 벗어나고저 중국의 연변으로 이주해왔다가 후에 는 료녕성 개평현에 자리를 잡았었다. 하지만 1931년 중국의 만 주땅도 섬나라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될줄이야. 철로에서 일보던 아버지는 여러차례 직장을 바꾸어야 했는데 눌하역전에서 치치할 철로국으로 옮겼다가 얼마후엔 덕백사(德伯斯)역전 역장으로 있 게 되였다. 그때 어린 민첩이는 매일 기차를 타고 대석채(大石寨)로 통학 하였다. 덕백사는 몽골족들이 많이 거주하고있는 아 름다운 고장이였다. 파아란 초원을 달리는 몽골의 수레차(勒勒车)초워에 내 려앉은 구름떼마냥 유유히 흐르는 양떼들을 보노 라면 어린 민첩의 가슴은 즐겹고 훙겨웠다. 그는 자주 남동생을 데리고 산에 올라 산나물을 캐고 버섯을 떴다. 아버지는 낚시질 을 즐기였고 어머니는 부지런히 닭을 길렀다. 대자연의 헤택을 받던 그 동년의 생활은 지금도 한폭의 그림처럼 주억속에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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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이곳에서 이년 살고 아버지가 또 태래 현 (泰来县) 으로 이 동하였으므로 민첩이는 테레헌의 중앙 실험소학교에 입학하게 되 였다. 이 학교에서는 일본인선생이 조선족과 몽골족과 한족학생 에게 일본어로 글을 가르졌는데 민첩이는 일본어공부에서도 우수 한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또 얼마 안되여 아버지는 차지할철로 국으로 전근되었고 민첩이는 치치할 철로 자제 학교에 전학하였다.는 이렇게 온 침식구는 복만철로연선을 따라 이사를 다녔다. 실은 고통스런 떠돌이생활이였으나 철부지인 민첩이는 오히려 크 낙한 즐거움을 맛보았다. 여러 곳의 각이한 풍토인정은 그의 호 기심을 잔뜩 자극하였고 순박하고 아름다운 화면들이 수시로 그 의 상상속에 오색령롱히 꽃을 피웠다. 그는 저도 모르는 새에 신비한 예술의 신에게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1945년 일제가 투항하고 소련홍군이 동북으로 들어 왔으며 1946 년에는 팔로군이 지지할시를 해방하였다. 어지러운 시국때 문에 민첩이는 중학에 승급하지 못하고 소학교 6학년에 여러해 머물러있는 형편이였다. 1947년 가을, 14 살에 난 김민첨은 동북 민주련군7종대 21사의 선전대원모집 시험에 합격되여 선진대원으 로 되였다. 시험에 그는 <5월의 생화>란 노래를 불렀는데 그의 예쁜 모습과 청아한 목소리는 민주련군의 모집일군들을 매우 기 쁘게 하였다. 김민첩과 수십명의 신대원들은 군복을 갈아입고 길림성 도남(桃南)으로 가서 정치문화학습과 여러가지 훈련을 받았다. 이 때로부터 민첩이는 따사로운 부모슬하를 떠나 그로써 의 일생길을 걷게 되였다. 초기에 그는 조선 김치를 먹을수 없는 것이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웠다. 1947년 겨울, 아군은 공세를 벌려 장무(彰武)를 점령하였 다. 동구문 (东九门) 전투가 끝나자 부대는 심양남부일대로 전이 하였다. 민첩이가 소속된 21사선전대는 부대를 따라 행동하였는 데 하루저녁에 7십, 8십리 길은 걸었다. 그들은 이르는 곳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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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당의 정책과 규률을 선전하면서 담가대를 조직하여 상병원을 수송하도록 인민대중을 동원하였다.
그해따라 심양남부일대의 겨울은 령하 30°C~ 40°C에 달하였다. 그들은 어둠속을 더듬으면 서 울퉁불퉁한 산길을 걸었는데 민첩이와 몇몇 녀대원들은 몇번 이고 눈구뎅이에 빠져들어갔다. 가도가도 끝없는 행군에 발은 열이 확확 났으나 신바닥은 매끌매끌하게 얼어불어 걸음걷기가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민첩이는 나이가 어리다보니 행군의 요령도 몰랐고 경험도 없었다. 그는 수없이 미끄러지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악스레 대오를 따라갔다. 마음이 조급하고 안타 까울수록 두다리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눈속에 자빠질 때마 다 온몸에서 살점을 어여내는듯하였다. 이런 그를 두고 대원들 은 (송아지가 사면팔방에 절을 올린다)고 익살을 부렸다. 대오 는 동녘이 희붐해질무렵에야 숙영지에 도착하였는데 피곤에 절은 민첩이와 대원들은 먹기도 마시기도전에 깊은 잠에 끓아떨어졌 다. 분대장 곽운방은 매번 숙영지에 이를 때마다 물을 끓여놓고 민첩 이와 어린 대원들을 일으켜 머리카락으로 발을 비벼 씻게 하였다. 민첩이와 교마들은 그를 정겹게 언니라고 불렸다. 민첩 이는 발에 물집이 생기고 물집 터친 자리가 감염되여 고름이 났 음에도 끝까지 대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1948년의 설명절을 그들은 오리포(五里浦)에서 보냈다. 이 어서 사평을 포위공격하는 임무를 맡고 부대는 심양남부에서부터 며칠간 강행군으로 사평성밖에 이르러 사평을 포위하였다. 사평 은 중요한 군사요지로서 그곳을 점령한다는것은 장춘-심양의 연계를 끊는것과 같았다. 전투는 처음부터 매우 치렬하였다. 선전대의 대원들은 전선과 십여리 떨어진 곳에서 의료대와 배합하 여 상병원을 보살피고 물을 긷고 수직을 섰다. 한번은 전선으로 부터 들려온 상병원중 머리에 중상을 입은 전사가 있었는데 처 음엔 끊임없이 신음소리를 내다가 밤이 되니 조용하여졌다.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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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이는 이상히 여겨 콩기름 등잔을 켜들고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 더니 얼음처럼 차기웠다. 부상입은 몸이 얼마나 추웠을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난 그는 부상병에게 겹겹이 이불을 덮어주었 다. 날이 새여 의료대의 동지들이 상병원을 검사할 때에야 그 부상병이 벌써 죽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전쟁은 이렇듯 참혹하였다.
당시 7종대는 지혜롭고 영용무쌍하기로 이름난 등화 ( 邓华) 대장과 담보인 (谭甫仁) 정위가 령슬하였고, 21사는 리화민(李华民)사장, 주민친( 朱民亲) 정위가 지휘하였다. 사평이 해방되자 그들 부대는 사평에 주둔하면서 휴식 정돈하고 경축대회를 열있 다. 선전대에서는 절목들을 공연하였는데 김민침은 양용 (杨勇) 이 공로를 세우다>이라는 연구에서 양용의 녀 동생 역을 맡았다. 사평에서 한달을 머문후 부대는 곽가점 (郭家店)으로 이동 하였다가 다시 명령을 받고 장춘을 포위하였다. 그들은 장춘남부 의 범가툰(范家屯)에서 장춘의 적들이 철로 연선을 따라 남으로 철퇴하는 것을 막아 싸웠는데 이에 격노한 국민당군대는 비행기폭격을 들이었다. 그들이 들었던 집은 폭격에 한모둥이가 떨어져 나갔고 선전대의 서기관이던 리걸 (李杰)은 이 폭격에 희생 되었 다. 리걸의 안해는 조선족녀성이였다. · 이 시기 동북의 정세는 이미 결정적 변화를 가져왔고 아군은 주동을 취하였다. 그들 부대는 범가툰을 떠나 구방자 (沟帮子)를 거쳐 호산 (虎山), 북진 (北镇)을 치고 금주 (锦州)를 포위하였 다. 이 기간의 행군은 매우 간거하였다. 그들은 톱질하듯이 같 은 길을 연거푸 행군하였는데 민첩이의 두발은 빵처럼 퉁퉁 부 어올라 얼굴을 찌프리뜨리고 억지로 걸었다. 그는 이망 곁에 내 이 발허리가 아파서 못견디겠어요.> " 하고 옆사람에게 말했다. 그러자 힘겹게 행군하던 대원들속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대원 들은 눈물이 나도록 웃어댔다. 그 후부터 동지들을 < 너 (발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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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아직도 아프냐?>, <년 발에 허리가 있으니 머리는 어데고 손은 어데냐? >. <우리의 친애하는<발허리> 가 왔구나.>고 놀려주 었다. 지금까지도 로전우들이 모이게 되면 그때의 일들을 회억 하면서 어린이들처럼 유쾌하게 웃음판을 벌리군 한다. 간고하긴 해도 순박하고 화기애애한 생활이였다. 지쳤던 행구길에서도 많 은 동지들이 그의 짐을 들어주었으며 별다른 음식이라도 생기면 두었다가 민첩이와 몇몇 꼬마들에게 나누어주군 하였다.
1948년 늦가을, 금주가 해방된후 그들 부대는 료서대전역에 참가하여 심양으로부터 도망쳐나가는 장개석군대를 가로막고 싸 웠다. 당시 동북의 장개석부대는 바야흐로 패배의 변두리에 이 르렀으므로 선전대의 남대원들은 빈 바이올리곽을 들고도 무기를 로획하거나 포로를 체포학수 있었다. 김민첩과 녀대원들은 백성 의 집에 감히워있었는데 창밖으로 내다보니 총탄이 비발치듯하였 고 멀지 않은 전쟁마당으로부터 함성소리, 포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이 싸움이 끝난후 부대는 안산에 주둔하여 그곳에서 전 동북의 해방을 경축하였다. 그해말에 부대는 또 천진으로 진 군하 였다. 김민첩과. 선전대원들은 이른 새벽이면 전사들보다 두 시간 앞당겨 출발하여 숙영지와 20, 30리 떨어진 곳에 가서 나 무를 찍어서 선동막을 치고 솔나무가지와 종이꽃으로 기껏 장식 해놓았다. 그리고 전사들이 지나갈 때면 준비해두었던 문예절목 을 공연하였는데 대개가 콰이반(快板), 양걸, 합창이였다. 규모 가 크고 성세호대하였던 한차례는 산해관성밖의 한모퉁이에서였 다. 그들은 나무로 문모양의 막을 치고 그우에 파란 소나무가지 와 그들이 밤새워 만들어낸 빨간 종이꽃을 꽂았다. 그들은 그 막 앞에 서서 <황하대합창)을 공연하였는데 격앙된 노래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1949년의 설명절을 선전대는 천진시민들과 갈이 지냈다. 그 들은 전사들과 지민들을 위하여 <황하대합창>과 <피눈물의 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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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血泪仇)을 공연하였다. 천진시민들은 붉은 저고리에 록색바지 를 입고 머리에는 꽃을 달고 거리구경을 하였는데 그 흥성흥성 한 명절기분은 민첩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1949년 4월, 료심, 평진 전역의 시련을 겪은 부대는 또다시 광주해방의 전투임무를 받고 보무당당하게 하북성에서 출발하여 하남과 안휘를 지나 장강을 건너 구강에서 강서성을 꿰뚫고 구 룡산을 넘어서 광주에 도달하였다.
남하하는 제4야전군 전투부대의 절대다수는 불방사람 이였는 데 그중에는 조선족이 적지 않았다. 그때 16세 였던 민첨이는 기 방과 쌀주머니를 메고 하루에 70, 80리길을 행군하면서 후식시 간엔 선전활동도 진행 하였다. 봄철에 하북을 떠나 몇달간 간고 하게 행군하여 장강이남에 도착한 때는 삼복철이였다. 찌는듯한 무더위와 그칠줄 모르는 폭우속에서 계속된 행군길에 그들은 극 도로 피로하였다. 많은 전사들은 기후와 수토가 맞지 않아 고생 이 많았고 학질, 리질병이 몰아쳐서 더욱 지쳐버렸다. 민첩이도 학질에 걸려 40도로 달아오른 몸을 끌고 안개속을 더듬는듯한 멍멍한 기분속에서 간신히 대오를 따라갔다. 목이 확확 불불을 때면 논발의 더러운 물을 들이키고 마늘을 많이 먹어서 소독하 기에 애썼다. 지쳐서 죽어가는 전사들을 안타까이 목격하며 눈 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강했군의 고난에 사람뿐만아니라 군마까 지도 병이 생겨 짐을 분리우고 길가에 늘어지는 파이니 쉬염쉬염 전우들의 부축을 받으며 걷다가도 끝내는 어느 이름모를 촌 가에 영원히 잠든 전사들. 그 얼마였는지 ! 하지만 이렇듯 참기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전사들은 서로서로 고무하고 도우면서 행군 을 계속하였다. 부대가 월감변경에 이르렀을 때 상급으로부터 새로운 명령이 하달되였다. 시간을 단축시켜 평탄한 공로에서의 행군계획을 포기하고 월감변경의 구련산을 넘어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라는것이였다. 이때부터는 하루에 백이십리를 걸어야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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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어떤 때는 마을에 도착하여 금방 밥을 지어 먹자 하는데 명령이 내려 밥 한숟가락도 입에 대지 못한채 또 행군길에 나서야 했다. 감미로운 밥향기가 허기진 배속으로 거침없이 침입하였던 그 애석함은 지금 회역해보아도 한스러울 지경이였다.
1949년 7월 15일 오후 그들은 성공적으로 광주에 진입하였 다. 이로써 2년 남짓한 행군과 전투의 생활을 한단락 결속지었 다. 하북에서부터 광주까지 이어지는 무수한 발자욱마다에는 전 사들의 피땀이 질게 슴배여있었다. 고난의 생활속에 강의한 의 지가 과시되였으므로 민첩이는 3등공을 수여받고, 1949년 12월 6일에는 광주시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였다 .
광주에서 선전대는 대형연극 <리자성>을 공연하였는데 민첩 이는 극중에서 궁녀와 궁정무녀역을 하였다. 중산기념당은 그들 의 연습장이자 연출극장이였다. 이듬해 겨울, 조직에서는 민첩 이와 몇몇 대원들을 전사가무단(중남부대예술학원의 전신임.)에 파견하여 춤을 배우게 하였다. 그때에 배월던 쏘련홍군무, 마차 몰이춤, 중조인민친선무는 크게 절찬을 받는 춤들이였다. 1948 년 봄, 부대는 원 7종대 21사를 44군 132사로 고치였고 1951년 봄 민첩이는 44군문공단으로 전근되여 예술의 길에서 보다 련마 할수 있게 되였다. 그는 독창, 독무로 이름을 떡치였는데 그가 불렀던 <진찰기소녀 >와 독무 <신강춤>, <중조친선의 춤)은 전사 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런 절찬속에서도 그는 문화지식 을 배우는데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2년 가을 그는 남창 의 중남부대에 가서 초중, 고중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였다 1953년 원단에 민첩은 결혼하였고, 년말에는 첫딸까지 보았다 그들 둘은 부부간이며서 전우이기도 하였다. 미술을 즐기는 남 편의 그림을 골라 액틀에 넣어 벽에다 정히 걸어놓은 소박한 집 은 해복의 향기 그윽한 새 가정이였지만 민첩은 분투의 길에서 종래로 멈출줄 몰랐다. 그는 보배덩이 딸애를 공군부대 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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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맡기고 열심히 시험준비를 하여 1954년 7원에는 무한에서 .대 학통일시험에 응시하여 중국인민대학 예비과에 입학하였으며 일 년후에는 력사과에서 공부할수 있게 되였다. 그해에 그는 두번 째로 임신하였는데 긴장하게 학습을 견지하였으므로 조산을 초래 하였다. 그는 병이 많고 허약한 아들애를 보모에게 맡기고 계속 공부하였으나 아들애의 큰 병으로 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학교를 중퇴하게-되였다.
텔레비존사업에 투신
우리 나라는 전자정보기술의 발전에 따라 1958년과 1959년 에 북경. 상해. 광주 3대도시에 선후로 텔레비죤방송국을 성로 하였다. 이 이전에 북경텔레비죤방송국(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전 신 임. )의 국장 맹계여(孟啟予)와 광동텔레비죤사업국 국장 전위 (田蔚) .부국장 이민 (伊敏)상해 텔레비죤방송국과 흑룡강텔레 비죤방송국의 지도자들은 쏘련으로부터 헬레비죤 기술과 편집방 송업무에 대하여 학습하고 돌아왔다. 각 방송국의 업무일군들은 북경에 와서 학습하였다. 1958년부터 1966년까지의 몇년간에 텔 레 비죤이라는 이 신형의 전파형식은 북경으로부터 광주, 상하 및 기타 도시로 신속히 발전하였다
김민첩은 1958년 년말에 한창 계획준비단계에 처해있는 광동텔레비죤방송국에 전근되였다. 신식기술과 예술의 결합체인 이 새로운 사업에 적응하고저 민첩은 일년간 고심히 자습하였다
1959년 9월 30일 광동델레비죤방송이 정식 시작되였다. 광동텔 레비죤방송국의 첫 텔레비죤극 < 사위는 누구?>는 왕유초(王维超)와 김민첩이 감독한것인데 왕유초가 감독 그가 부감독이였 다. 공연방송실에 풍경을 장치해놓고 현장에서 직접 방송하는 도중 민첩은 그만 지나친 긴장감으로 하여 머리속에 숙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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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워두었던 렌즈 호수가 모두 범법이 되여 조종대가 혼란에 빠 자였다. 다행히도 왕유초감독이 제때에 도와주어 실패를 피면할 수 있었다. 이 일에서 민첩은 큰 교훈을 섭취하였다. 그는 <희극개론>, <촬영상직>, <영화몬따쥬>, <영화감독기 초>, <배우수양>, <극작품창작에 대한 상직>, <화장술에 대한 상식>, <심리학> 등 작품들을 대량으로 탐독하였으며 감독조종 대의 조종순서에 대하여도 짬만 있으면 고심히 련습하였다. 노 력끝에 묘리가 생긴다고 민첩이는 마침내 사업에서의 능수가 되 였으며 1961년후부터는 독립적으로 문예절목과 텔레비죤극을 감 독할수 있게 되였다.
이 무렵에 그는 광동텔레비죤방송국의 경명진(耿明辰)이 감 독한 텔레비죤극 < 살구파는 처녀>에서 시골처녀역을 감당하였으 며 텔레비죤극 <춘풍양류>에서 당위서기역을 말았었고 텔레비죤 극 <지원군>에서 지원군간호원역을 맡았으며 백영걸(白英杰) 감 독이 감독한 텔레비죤소품 <제자소식>에서는 중학교 교장역을 맡았다.
그는 또 선훈로 <가무주임>, <부부지간>, <그처럼 살자> 등 텔레비죤극을 감독공연하였는데 그중 <그처럼 살자>는 광동텔레 비죤방송국에서 방송된후 지도일군들과 관중으로부터 열력한 환영을 받았다. 텔레비죤극 <그처럼 살자>는 웰남사람 원문추(阮文追)의 안해 반씨연(潘氏娟)녀사의 동명소설을 텔레비죤극으로 개편하것인데 600평방메터도 안되는 공연실에 원문추부부의 침 실, 커피점, 경찰서의 사무실, 감옥의 대청, 복도, 감방, 사형 장, 가두공원 등 9개의 크고작은 풍경을 설치해놓고 30명의 배 우를 사역하여 현장에서 직접 공연방송한것이였다. 이렇게 많은 배경과 배우를 가지고 아무런 실수없이 와성해낼수 있었다는것은 1964년 전국텔레비죤방송계퉁에서 드문 일이였다. 이는 감독으 로 하여금 화면을 엄밀히 조직할것을 요구하는바 영화의 몬따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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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아니라 무대 연극의 표현기교도 필요로 하고있다. 감독은 촬 영, 록음, 음향, 조명, 무대배경설치, 북장, 화장, 연극도구처 리 등 면에서 조예가 깊어야만이 실제 방송에서 실수가 생기지 않을수 있었다. 김민첩은 이 작품을 20일 만에 완성해냈다. 이 기간 (1060년부터 1966년까지)에 그가 감독한 가무련환모 임은 백차례에 가까왔다.
그가 포만한 열정으로 텔레비죤문예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 기 시작할 때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김민첩은 <검은 문예로 선>의 집행자로 지명받고 보잘것없는 문에조 조장자리에서 쫓겨 났다. 그에 대한 대자보가 벽에 까맣게 나 붙었다. 방송국 국장 전위( 田蔚) 동지를 비판할 때였다. 전위는 전에 전체텔레비 죤 방 송국대회에서 김민첩을 표창한적이 있었는데 반란파들은 그때 일 을 들추어내면서 그더러 앞장서서 전위를 투쟁함으로써 계선을 똑바로 그으라고 떠들어댔다. 김민첨은 온갖 모욕과 참소를 참 아내면서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뜻하지 않는 재난은 거듭 닥쳐들었다. 그의 남편이 당시 오 법헌, 림립과가 공제하고있던 공군부대에서 말 한마디 잘못한 원인으로 현행 반혁명분자로 투쟁받게 되였다.
온 집 직구는 서북고원에 쫓기여갔다. 남편은 섬서성 부대의 농장에서 양몰이를 하였고 민첩은 두 어린 것을 데리고 청해성 서녕시로 가서 청해 방송국에서 일 보게 되였다. 직장에서는 반혁 명가족이라고 주숙도 생활필수품도 관계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 들을 데리고 부대의 기숙사에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1970년 겨 울, 서녕사의 기온은 령하 20도로 내려갔다. 당시 시장에는 난 로 파는것이 없었다. 그들이 주숙하고있는 집은 물방울도 얼음 으로 굳어지고 아들애가 애지중지 기르던 토끼도 추위에 얼어죽 었다. 어느날 딸애가 오물오돌 뗠다가 밖으로 나가더니 나무가 지와 풀을 안고 들어와 집안에서 불을 지폈다. 짙은 연기가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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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집안에 가득차서 세식구는 숨도 바로 쉴수가 없었다. 빨갛 게 언 손을 불에 쬐이는 딸의 얼굴은 어느새 얼룩이 졌으며 민첩은 아들을 품에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게 무슨 혁명인지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리해가 가지 않았다. 후에 방송국의 한 동지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 낡은 난로를 빌려주어 불을 지피게 하였는데 그때의 고답던 생각을 지금도 잊을수 없다고 그는 회 억하였다. 그들이 주숙하고있는 숙사는 방송국까지 5리가 넘었 다. 그는 매일마다 멜가방에 석탄을 담아가지고가서는 불을 지 피였다. 해발 2,100메터의 청해고원은 평지보다 산소가 30%나 부족되는 곳이였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런 환경에서 8년을 보냈다.
4인무리가 떡어진후 남편은 공구정 치부로 돌아오게 되였고 그는 1977년에 중앙텔레비죤방송국 문예부에서 사업하게 되였 다. 딸애도 1980년에 북경방송학원으로 전근되였다. 그러나 자 식은 하나밖에 데리고 온지 못하다는 정책상 규정으로 아들만은 여전히 청해고원에 남아있을수밖에 없었다.
민첩이는 청해에 있는기간 청해성방송국을 도와 텔레비죤방 송국을 조직, 건립하였으며 수많은 편집방송업무일군들을 열성껏 양성해내였는데 그들중에는 후에 청해텔레비죤방송국의 지도자로 된 사람도 있고 실무골간으로 된 사람도 있다 .
문화대협명후 중국의 텔테비죤사업은 신속한 발전을 가져왔 다. 전국에는 30여개의 성급텔레비죤방송국과 150여개의 시급텔 레비죤방송국이 있게 되였으며 5억의 텔레비죤관중을 가지게 되였다. 그리고 중국의 텔레비죤절목은 세계로 진출할수 있게까지 되였다. 이 휘황한 발전의 물결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지난날을 잊을수가 없었다. 광동텔레비죤방송국을 처음 건립할 때의 정경 을 일음수가 없었으며 헬레비죤극을 처음으로 실황방송할 때를 잊을수가 없었다. 크낙한 고통끝에 낳은 자식이 고난을 이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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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건실히 자라는걸 볼 때처럼 그는 언제나 애틋하고 뜨거운 마 음으로 텔레비죤사업의 발전을 지켜보았다.
1977년 민첩이는 중앙텔레비죤방송국문예부로 조동하여 가 무조 조장으로 있다가 1982년에는 문예부 부주임으로 되였다 이 기간 그는 대량의 가무련환모임과 텔레비죤예술종목의 공연을 편집, 감독하였다
1979년의 겨울, 그는 많은 문예일군을 거느리고 광주에 가 서 광동텔레비죤방송국과 합작하여 렬사릉원에서 1980년 춘절만 회를 위한 대형문예절목을 제작하였다. 마계(马季), 당걸충(唐杰忠) ,조 충상(赵忠祥)을 주최자로 배치한 이 련환모임은 종목 이 풍부하고 다채로왔다. 이는 문화대혁명이래 처음으로 밤하늘 아래서 제작된 로천종목이였다.
신교호텔(新桥饭店) 에서 실황제작한 <1982년 춘절련화모 임>은 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런환모임에 처음으로 중 국녀자배구팀의 형상이 출현하였으며 그가 천리마를 알아본 백락 (伯乐)의 안광으로 발견해낸 가수 팽려원 (彭丽媛)을 이 련환모 임 을 통하여 전국 인민앞에 추거하였다. 그후 그는 또 울균검 (郁均剑)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예술무대로 추거하였는데 후 에 그는 저명한 가수이자 유명한 시인으로 성장되였다.
<1984년 추절련환모임)은 전국 인민의 사랑을 깊이 받아온 련화모임이였다. 김민첩은 이 련환모임의 조직자의 한사람으로서 종목들을 엄격히 검사하고 선정하였다. 1983년 국경절이후부터 김민첩은 새해의 춘절 려환모임 준비때문에 우선 준비위원회를 내 온후 준비위원회의 사업일군들과 같이 사처로 뛰여다녔다. 한번 은 심수에서 취재를 마치고 주숙지로 돌아오는길에 우연히 택시 운전수가 틀어놓은 록음기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조리에 귀를 강구 었다. 감정과 음향이 잘 융합된 그 노래는 들을수록 김민첩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운전수더 러 다시하번 들려줄것을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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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함께 앉은 동무들에게 잘 들여보라고 일렀다. 동무들은 그 노래가 과연 감동적이라고 평가하면서 김민첩의 뛰어난 예술 적감각을 찬탄해마지 않았다. 그 노래가 곧 장명민이 부른 나의 중국심기 이였다. 그때 그들은 창명민가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김민첩은 즉시로 홍콩신화사를 통하여 장명민전생을 춘절련환모 임에 초청하기로 결정하였다. 1984년 춘철련환모임 후 온나라 이 르는 곳마다 어린애들에게까지 열렬히 불려진 이 노래가 예술주 양이 깊은 한 근면한 조선족녀성에 의하여 발견된 것을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하고 있다. 이 련환모임에 있었던 소품( 국수먹기) 는 시험공연대까지도 자질구레한고 중점이 돌출하지 못한 등 문 제로 불만족스러웠으나 김민첨은 수개의견을 예리하게 제기하여 고치도록 하였다. 정식공연이 끝난 후에는 관중들의 열렬한 호평 '을 받았다.
1984년 춘철련환모임은 각양각색의 배우가 많이 참가하였고 절목도 풍부하고 다채로 왔다. 중앙텔레비죤 방송국에서는 처음은 로 홍콩가수 장명민, 계수란을 요청하였으며 대만에서 갓 돌아 온 황아원(黄阿原)과 홍콩의 영화배우 진사사 ( 陈思思)와 강곤 (姜昆), 강려려(姜黎黎) 를 주최자로 내세웠다. 모임엔 통속노 래가 있는가 하면 리곡일 (李谷一), 은수 매 ( 殷秀梅), 곽송 (郭松), 소평 (苏平), 주명 영 (朱明瑛), 우숙진 (于淑珍) 등 저명한 가수들의 노래가 있으며 그의 경극, 월극, 예극, 황대국 표연의 정채로운 단락들도 있었다. 뿐만아니라 해 등(海灯) 법사의 무술 표현과 왕경우의 유머표연과 새로 창작된 재담이 있었다. 섣달 그믐날 텔레니죤앞에 모여앉은 사람들속에서 웃음소리, 박수소리 가 끊임 없었으며 방송국에는 각 성, 시의 요청 전화와 축사가 부 단히 들어왔다. 이 춘절련환모임은 섣달그믐날 인민대 회당 단체 하례 (团拜)의 중요한 화제로 되였으므로 특등상을 수여받았다. 김민첩의 창조적 노력하에 조직된 변환모임은 종래로 중복됨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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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제나 신선하공 감미로왔다. 사람들은 텔레비죤방송국에 걸 출한 두 녀있이 있다고 혀를 내둘렸는데 그 두사람인즉 저명한 양걸(杨杰)과 김민첩이였다
그가 감독한 예술절목 <장한가(长恨歌)>, <남북채풍행(南北采风行)(신춘락 (新春乐)), 희극절목<왕희봉(王熙凤)), < 금환녀(金花女), <매정설(梅亭雪)> <채방기(柴房记)> 등은 국외로 널리 발행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985년 김민첩은 중 앙텔레비죤방송국 영화텔레비죤제작부 부주임으로 있는 기간 영화이야기편 <곡예세가>, <홍군이 남겨놓고 간 아이>, <결책> 등을 촬영하였다.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경비를 내고 영화제작 회사에서 촬영하여 텔레비죤에서 상연한 이런 현상은 과거엔 전 혀 없었던 일이다. 그는 전국 각지의 텔레비죤방송국 및 사회단 체들에서 추천해온 텔레비죤극들을 심사선정하였는데 1985년부 터 1986년까지 일년사이만 하여도 약 2,500여부의 텔레비죤극과 100여개의 극본을 세심히 보았다. 그는 낮에는 사무실에서 텔터비죤극을 심사하였고 밤에는 집에서 극본을 보았는데 날마다 밤 12시전에 휴식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또 텔레비죤극 촬영허가증을 비롯한 텔레비죤극의 생산관리에 대한 일련의 규장제도를 제정하였다.
천성이 근면한 김민첩은 예술적추구의 길에서 종래로 만족 을 모르고 탐구하였을뿐만아니라 젊은이들에게도 좋은 학습기화 를 창조해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985년 그는 텔레비죤극 의 보조금에서 얼마간을 떼내여 상해희극학원에 주어 젊은 세대 의 감독들이 텔레비죤극을 촬영하는데 경비로 쓰게 하였다. 뿐 만아니라 그들의 극본들을 하나하나 엄격히 심사하였다. 그가 련속 사흘간 발을 새워가며 8개 극본가운데서 골라낸 3개의 극 본은 촬영후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방송하자 널리 호평을 받았 으며 그중의 두부는 1986년 <비천상< 飞天奖>을 받았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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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들은 현재 각지 텔레비죤방송국의 골간으로 일하고있는바 사 천성의 반효양(潘晓阳)은 10대우수감독의 칭호를 받았으며 연변 텔레비죤방송국의 박준희, 섬서의 왕소원 등도 우수한 감독으로 성장하고있다.
김민첩은 1985년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부교수급의 주임 편집직함을 궁정받았다. 그는 일찍 국가급의 제5, 제6기의 텔리 비죤극 < 비천상>의 심사위원이였으며, 국가급 제1, 제2, 제3기 소수민족텔레비죤극과 예술절목 <준마상(骏马奖)>의 심사위원이 였다. 지금 그는 중국소수민족텔레비죤예술연구회 비서장으로 일
보고있다.
국제무대에서
김민첩은 1982년 중국라지오텔 레비죤방송예술가대표단의 한 성원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후 < 발전중의 조선텔 레비죤>이란 글을 써저 <대외보도 참고>잡지 1983년 제9호에 발 표하였다.
1984년 그는 체스교슬로벤스교공화국에서 개최한 금빛쁘라 하 국제델레비죤절에 참가하였다.
1988년 그는 미국을 방문하여 텔레비죤예술과 텔레비죤극의 고찰을 하였다. 귀국후 < 미국에서의 15일>이란 글을 써서 <당다 텔 레비죤>잡지 1989년 제4호에 발표하였다
1989년 그는 프랑스에서 개최한 칸느 국제텔레비죤절에 참 가하였으며 이듬해인 1990년에는 중국텔레비죤예술가대표단의 성원으로서 쏘련을 고찰, 방문하였다. 1991년 < 텔레비죤극예술 의 국제교류회>가 중경에서 열리였는데 그는 이 국제회의의 조 직자이자 비서장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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