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인처럼 병자를 살펴주던 은인
-남계숙에 대하여.
김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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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계숙이 지금 살아나 있을는지 찾게 되거든...이 신문 을 그 애한테 전해주려 무나...>
어머니는 생을 마감하면서 애끓는 소리로 이렇게 아들에게 유언하셨다.
그 신문은 중화민국 37년 (1948년 5월 12일 )의 제789호 <길 림일보>였다. 그 신문에는< 민주정부의 령도하에 길림 시공사합 영병원의 의무사업이 뛰어난 성과를 이룩함>이라는 큰 표제 밑에 남계숙의 모범사적이 실려있었다. 짧은 편폭의 이 통신은 군구 후방병원의 남계숙 등 간호원들이 부상병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였다고 쓰고있었다.
남계숙은 1986년에야 녀동생을 찾아 압록강을 건너온 오 로부터 그 신문을 물려받을수 있었다. 어머니와 갈라진지도 벌 씨전의 일이 되였다. 1948면, 남계숙은 입당문제 때문에 집으로 편지하였었는데 그 편지가 되돌아왔다. 알고보니 오빠가 조선에 간부로 파견됨에 따라 온 가족이 조선으로 이사한 것이였다. 딸 의 이름이 박힌 신문을 자나깨나 가슴에 품고 강변에 내놓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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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격정하듯 무던히도 속을 썩여온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딸 을 보고파했듯이 남계숙 또한 얼마나 어머니가 그리웠던가. 글 한자 모르는 어머니가 림종지까지 소중히 간직해온, 누렇게 빛 이 바랜 신문을 남계숙은 비오듯 눈물을 흘리며 고이고이 두손 에 받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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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숙은 1931년 7월 25일 함경북도 회령군의 농민가정에서 3녀 1남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한후 그들 가족은 중국의 만주땅으로 살길을 찾아 이주하였다. 할아버지 , 할 머니와 두 삼촌이 아버지와 함께 중국의 흑용강성 녕안에 자리 잡고, 몇년후에 어머니 허씨가 계숙이 4형제를 오룽조롱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찾아왔다. 그때 계숙이는 6살이였다. 구멍 뚫린 탄자를 웅그러쓰고 일본인의 석탄 실은 기차바구니에 시달리며, 그러나 한가닥 희망과 즐거움을 안고 찾아오니 마른 하늘에 벼락과도 같은 소식이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집안의 기둥이던 아버지가 상한병으로 영영 돌아갔다는 것이였다. 쓸쓸한 이국땅에 적막하게 생겨난 무덤앞에 어머니는 터지는 가슴을 붙안고 쓰러 저 오래오래 일어나지 못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네자식을 먹여살리는 일이 어머니의 가냘픈 어깨우에 떨어졌다. 어머니는 힘든 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억척스레 일하였다. 어머 니가 석탄 캐는 로동자로 일할 때였다. 한번은 석탄굴이 허물어 지는바람에 어쩔 새 없이 땅속 깊이에 묻히운적이 있었다. 그때 만약 동네사람들이 달려들어 제때에 파네주지 않았더라면 남편을 따라가겠다고 수없이 외워온 어머니의 다짐이 차가운 현실로 되 였을것이였다. 이 일이 있은후 어머니는 두부장사를 하였는데 신새벽 콩을 다 갈아야 아침두부로 내다 팔수 있었다. 그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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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부자집 삯빨래, 삯일을 틈없이 계속하였다. 맏이인 오빠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고 언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쌀 회사에 들어가 쌀에 돌을 골라내는 일을 하면서 공부하였다. 계숙이와 어린 동생은 상점 앞이나 쌀가공 공장에 다니며 석탄찌꺼기 를 주어서 집에 불을 땠다. 비록 딸자식일 망정 공부를 하여 눈 을 뜨게 되면 자기처럼 비참한 운명에 봉착하더라도 속수무책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자식들을 공부시키려고 끈질 기게 힘을 썼다. 남계숙은 9살에 녕 안국립학교에 입학하여 1945 년 14 살에, 출입하였다. 바로 그해에 오빠가 참군하여 동북군구 목단강군분구 련급간부가, 되였으므로 온 집 식구는 오빠를 따라. 묵단강으로 와서 목단강교구에 집을 잡게 되였다. 군속이라 땅 과 집을 분여받았으므로 농사를 짓고 쌀장사, 두부장사를 하면 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때 향촌 부녀청년위원회가 설립 되였는데
남계숙이는 청년위원으로서 민병훈련에 열정적으로 참가하였으며 1946 년에 있었던 양자영 부대 토비숙청에 참가하였다. 그후 오빠 는 도문으로 조동되여 만능회사(万能公司)에서 중국과 조선의 량식운수를 맡아보게 되였다. 온 집 식구는 또 오빠를 따라 도 문으로 이사하였다. 그때 그의 집에는 계속이와 언니와 녀동생 과 형님, 조카가 있었는데 어머니 혼자서 여섯을 먹여살리기가 힘겨우므로 남계숙은 자기 하나의 입이라도 덜려고 개인 병원을 차리고있는 김의사를 찾아가 일을 시켜달라고 애걸하였다. 간호 원일이 딱 마음에 드니 그 일을 시키면 더없이 좋고 다른 일이 라도 무엇이냐 잘할수 있으니 일 좀 시켜달라고 애걸하였다. 그 러나 김의사는 그가 졸업장이 없다고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락 심하지 않고 오빠의 부대를 찾아갔다. 부대 지도일군들이 이 사 정을 가없이 여기여 그를 만능회사의 출납으로 배치하였다. 그 리면서 밤에는 지방인민정부에서 꾸린 동문정치학교 초중반에 들 어가 공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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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동북민주련군에서 녀전사를 모집하 였는데 10월에 도문에선 12명이 참군하였다. 오래전부터 오빠로부터 <공산당선 언)이라 책을 얻어보고 영향을 받아온 남계숙은 휘황찬란한 미래에 동경을 품고 12명 처녀들가운데의 한사람으로 참군하였다 그날은 환희와 격동의 날이였다. 그는 날듯한 마음으로 이불짐 을 꾸리고 헌 보에 옷가지를 챙겨넣었다. 말없이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천정구석에 매달아놓았던 자그마한 쌀주머니 를 내려서 곧 떠나갈 딸애에게 입쌀밥을 지어주었다. 지금까지 그 쌀주머니는 외동아들에 향한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과 기대의 상징이였다. 온 집 식구가 멀건 품죽을 먹으면서도 어머니는 아 들만 없으면 그 쌀주머니를 까딱 다치려 하지 않았다. 오빠가 올 때라야 남계숙과 언니와 너동생은 그 한없이 구수한 입쌀항 기에 하전껏 취할수가 있었다. 아들이 오면 어머니는 수수밥우에 주머니쌀을 한줌 얹어서 아들에게만 이밥을 떠주었는데 그때마다 계숙이와 언니와 너동생은 그 혜택을 받아 붉은 수수밥속에 간 혹 섞석든 하안 이밥을 맛나게 먹을수 있었다. 하기에 온 집 식 구는 이 집의 유일한 남자를 고대고대 기다렸다. 하지만 오늘은 무엇이나 특수하였다. 아들이 오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이밥을 지었고 계숙이 자신도 웬 일인지 평시에 그토록 먹고파하던 이 밥에 밥맛을 잃고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권유에 못이겨 장국에 다 밥을 하두술 말아서 억지로 먹었다. 그는 수많은 친구들이 이름을 싸인해준 효심의 붉은 띠를 어깨에 두르고 사람들의 만 세소리속에서 홍분에 박차 참군하였다. 어머니와 언니가 역전까 지 배웅을 나왔다. 언니는 아무 말 없이 울기만하였고 어머니는 그에게 꼭 사업을 잘해서 근 인물이 되라고, 편지를 자주 하고 건강히 있으라고 당부하였다. 납계숙은 참군한후 동북민주련군 제22후방병원에
배치받아 간호원반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6개월간의 간호원훈런을 거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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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반면에 지난 후에는 구대장(区队长)으로 일하였다. 1948년 3월 8일에 길림이 해방되자 그들은 연길로부터 길림 까지의 산길을 강행군하여 국민당육군병원의 집수에 들어갔다. 그들은 병원을 청소, 정돈하며 걸싸게 일하였다. 병원은 그들의 두손에 의하여 새로운 모습 으로 변신되였다. 병원에서는 인도주 의정신을 발양하여 국민당환자를 접수, 치료하였다. 한번은 두 발이 잘리운 상병원에게 수혈하였는데 그 사람은 나한테다 피를 주느냐, 나에게도 계숙이 만한 녀동생이 있노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였다. 얼마후 계숙이가 찾아가보니 그 사람은 죽고 없었다. 남계숙과 조선족간호원들이 헌신적으로 일하였으므로 길림일보에 서는 그들의 사적을 실었다. 그때 남계숙은 그 신문을 얼핏 보 기는 하였지만 더 신경쓸 여가가 없었는데 그로부터 38년 후인 1986 년에 어머니의 유물에서 옛날의 신문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1949년 남계숙과 간호원들은 길림 병원에서부터 연길로 되돌 이왔다. 그때 병원은 동북인민해방군 제3륙군병원이라 부르고 인민군대환자를 대량으로 접수하였는데 남계숙은 결핵병동 간호 장으로 있었다. 그들은 휴식 시간이 따로없이 바삐 돌아쳤는데 매일 잠잘수 있는 시간은 극히 적었다. 적의 폭격때문에 상병원 들이 주로 밤에 호송되었는데 간호원들은 하루밤에 몇백명의 상병원들을 담가로 나르고 이튼날엔 계속 상병원들의 치료에 나섰 다. 연길역에서 병원까지의 십리길을 17.18세의 간호원처녀들 은 땀벌창이 되여 뛰다싶이 다녔다. 둘이 담가를 들고 울퉁불퉁 한 길을 쿵 하고 잘못 디딜 때면 담가의 무게가 어깨우에 사정 없이 눌러지면서 숨막히는듯한 신음소리가 절로 새어나왔다. 밤 새 껏 기진맥진한 몸이지만 새벽의 싸늘한 공기가 얼굴을 스칠 때면 또 정신을 가다듬고 간호사업에 달라붙었다. 그들은 환자 들에게 세수를 시키고 상처를 소독하고 밥을 먹이고 옷도 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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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 중환자에게는 대소변을 받아주었다. 그들의 고도의 책임 감과 정열적인 사업태도는 친형제나 다름없건만 환자로서는 종래로 만족을 몰랐다. 어떤 상병원들은 우선 몸이 불편하다보니 모 든것이 귀찮아져 트집을 잡고 조폭하게 혁따를 뽑아서 간호원을 때릴 때도 있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할 때면 간호 원들은 어쩔바를 몰랐다.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영문을 몰라서 망설이다가도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상병원을 위안하려고 애썼 다. 샘물같은 마음을 담은 간호원들은 부상입은 천사들이 측은 하게만 생각되였다. 환자들을 돌보는 짬을 타서 남계숙과 간호 원들은 또 피고름이 묻은 붕대와 약솜을 씻었다. 모든것이 결핍 한 전쟁시기라 그들은 연거퍼 5년간이나 기름이 든 음식을 구경 도 못하였다.
설명절 때면 구대장(区队长) 인 남계숙은 며칠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면서 설맞이준비를 하였다. 어린 나이에 가릴 새 없이 힘에 부치는 일들을 하고있는 간호원들의 솜바지, 솜저고 리는 두껍게 때가 묻어 만들 반들하게 되였는데 남계숙은 그것들 을 밤도와 씻어서 난로불에 말리웠다. 새롭게 한해가 바뀔 무렵 간호원들에게 깨끗한 옷을 입히는 것이 구대장으로서의 뜨거운 사 랑이 담긴 새해 선물이였다.
처음 시체실은 담가를 들고 화장터로 갈 때였다. 신경을 곧 두세우고 황황이 걷던 남계숙은 그만 발을 헛디뎌 평일에 군사 훈련을 하느라 파놓은 방공호에 빠졌다. 서늘하게 덮씌운 것이 령혼이 없는 시체라는 의식이 온품으로 확 느껴지자 그는 날카 롭게 비명을 질렀다. 그후 차차 습관된 계숙이는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마음이 약한 간호원들에게 의식적으로 관심을 돌리면서 궂은일, 힘든 일을 돌봐주었다. 어머니가 계시는 도문은 연길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지만 그는 한번도 집으로 가지 않았다.
1949년 12월 25일 그의 뛰어난 표현에 의해 조직에 서는, 그 를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공산당이 지하 에서 나와 공개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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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당을 건립하던 때었으므로 첫번째로 열게 되는 선서의식은 여느때보다도 장엄하였다. 그날의 격동적인 느낌을 잊을수 없었 던 남계숙은 후날의 사업에서 늘 그날을 회익하면서 힘을 얻었 다.. 항미원조전쟁이 폭발되자 계숙은 남먼저 전투에 참가할 것을 신청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지독한 결핵균이 그의 폐를 침입한 뒤였다. 조직에서는 결핵병을 얻은 남계숙 등 100명 의 간호원들 을 흑통강성의 정가툰에 휴양을 보내주었다. 비록 결핵병을 치 료할수 있는 효과적인 약이 없어 태양료 법 (太阳疗法)을 쓸뿐이 였지만 식사조건이 개선되여 하얀 이밥으로 바뀌었고 충분한 휴 식을 할수 있었던 덕분에 계숙은 일년만에 호전되여 연길부대로 돌아올수 있었다.
1952년 계숙은 두번째로 항미원조전쟁에 갈것을 신청하였을 나 병원에선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제대 시켜주었다. 그는 길림 성삼림공업관리국 의무실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이듬해 23 세의. 나이로 계숙은 길림에서 결혼하고 1954년 남편을 따라 장춘시전 염병원으로 조동하여 내과 병동 간호장으로 일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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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중기 문화대혁명의 세찬 회오리바람이 중국의 온 지역을 휩쓸며 지상의 온갖 오물을 쓸어버린다고 야단칠 때 그 혼 잡한 세월 속에 서도 조용히 자기의 마음을 지키며 명석한 두뇌로 살아온 녀성이 있었으니 그가 곧 북경종류병원의 의사 남계죽이 였다.
남계숙 부부가 북경으로 전근된 것은 1956년 이였다. 그때는 중류병원이라 하지 않고 북경국제병원이라 하였는데 남계숙이 전 근되여왔을 에는 한창 준비단계에 처하여 있었다. 남계숙은 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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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6산부인과병원에서 일년을 실습하고 이듬해에는 협화병원(协和医院)에서 산부인과를 연수하였다. 1958년 병원이 정직으 로 건립되자 주은래동지의 건의에 따라 <중국의학과학원 종양연 구소, 일단병원>이라 명명하였다. 계숙은 부산과 종양병동 방사 성 치료실에서 간호장으로 일하는 한편 당내에서는 당소조장, 당지부 조직위원, -병원당총지 조직위원을 맡았다. 1959년에는 또 국제관계대학에서 2년간 공부하여 자신의 문화자질을 높였다.
그는 이미 딸 하나 아들 둘을 가진 어머니였다. 외교부에서 사업하고있는 남편은 출장가면 일년씩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그 혼자서 가정 안팎의 일을 도맡아야 했다. 그는 하는수없이 아이 를 학교에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공부하였으며 후에는 한살, 두 살, 네살이 되는 세 아이를 집에 가두고 밖으로 자물쇠를 잠그 고 출근하였다.
문화대혁명이 폭발되자 병원에서는 <검은 당)내 막을 적발하 고 검토하게 하였다. 계숙은 <검은 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당 지부 조직위원에서 물러나 사람들로부터 배척과 모욕을 받게 되 였다. 남편도 루명을 쓰고 <5. 7>간부학교로 쫓겨가게 되였다. 계숙은 아무말 없이 제때에 출근하면서 꾸준히 일을 찾아하였 다. 모두들 열을 올러 반란에 뛰여들었으므로 병원산부인과에는 우파인 로교수와| 계숙이만 남게 되였다. 계숙은 그 교수에게서 열심히 의술을 배우면서 환자들의 병을 보아주고 약을 지어주고 주사를 놓아주면서 병원일을 책임지고 하였다. 마음속의 고통도 커다란 동력의 힘으로 전환시킬수 있다고 생각한것은 이때부터였 다. 한번은 온 하루 환자들에게 병을 보아주고 저녁 8시에 피곤 한 몸을 끌고 되근하여 돌아와 저넉식사도 채 하지 못하였는데 병원의 반란파 한사람이 찾아와 자기네는 혁명하러 갈것이니 고 분고분 나와서 수직을 서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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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마다 수직을 서며 병원을 알뜰히 돌보았는데 중병으로 입원 한 합자들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어머니를 찾듯 그를 찾았다. .
열심히 배우고 진심으로 병자를 위해주는 그의 정신과 사업 태도는 같이 일하는 의사들을 감동시켰다. 1970년에 그는 준의 로 되였다. 여러 과의 주임들의 직접적인 방조와 양성밑에 그는 자궁경암. 자궁체앞에 대한 방사성치료와 라디움 치료기술을 배 워냈으며 수술치료와 화학치료, 중서의를 결합하여 치료하는 등 종양부과에 관한 기술을 여러 방면으로 잘 배워냈다. 특히 라디 움치료를 거친후 인체에 들어간 라디움은 영원히 법질하지 않는 특점이 있어 환자들로부터 널리 환영을 받았다. 1976년 그는 도 산부인과병원에 가서 연수하고 돌아왔다. 그에 대한 소문이 퍼 지자 동부의 조선족들 특히 화룡, 왕청의 조선족확자들이 그를 많이 찾아왔다. 헤어가 서툰 시골사람들은 불치의 병에 대한 일 루의 희망을 품고 종양병원의 유일한 조선족의사를 찾았다. 찾 아오는 사람으로서는 자기뿐이지만 남계숙이로서는 실로 허다한 환자들이였다. 그때마다 그는 반갑게 맞아주어 그들을 잘 배치 하고 자기보다 더 의술이 높은 의사를 찾아다니며 잘 치료받도 록 힘써주었다.
장기간 . 방사정치료에 종사함으로 인하여 그는 신체가 매우 허약해져서 늘 위에 반응이 생기고 혈압은 200mm/Hg까지 오르 고 심장이 나빠졌다. 1981년 어느 하루, 출근하려고 문을 나선 그는 얼마 검지 못하고 눈앞이 캄칼해지면서 정신을 잃고 쓰러 졌다. - 얼마후 지나가던 두 할아버지가[그를 일으켜세웠는데 혀 를 끝끝 차면서 중얼거리는 로인의 목소리에 몽롱한 가운데 정 신이 들기 시작하였는데 입에서 피가 나고 옷도 꽃어져있었다 두 로인은 집에 가서 잘 휴식하라고 타이르듯 말하였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두 로인에게 사의를 표한후 여전히 병원으로 발 길을 돌렸다. 종래로 지각과 결석, 휴식을 모르고 일해온 그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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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더우기 오늘은 라디움수술을 신청예약한 8명의 환자가 그를 기다리고있다는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그날따라 일손 이 모자라 그는 혼자서 간호원노릇, 의사노릇을 다하면서 끝내 8명의 환자에 대해 차근차근 수술을 끝내였다. 그는 퇴근후에도 시간을 짜내여 의료서적들을 부지런히 보았다. 그는 자기가 본 일본의학서적들중 무게가 있는 론문을 6편 번역하였다. 1978년 은 병원이 건립된 20주년이였는데 병원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학 술론문집을 내 였다. 남계숙은 7 명의 의사와 함께 론문집에 여러 편의 무게있는 론문을 발표하였다. 례하면< 자궁경내에서의 북 경형 용기의 효과적인 응용>, <자궁 경암의 예방치료에 대하여>등 론문에서 남계숙은 자신의 풍부한 경험으로부터 부인과종양의 예방치료를 위하여 효과적인 방안을 제기하였다..
1984년 그는 병원의 주치의사로 되였으며 1989년 9월에는 30년 간 병원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일하였다는 특수한 표창을 받았다. 사람들은 30년간 자기를 잊고 꾸준히 일하는 평범한 로당 원을 보았으며 중래로 만족을 모르고 자습의 길에서 굳건히 분 투해나아가는 완강한 조선족녀의사를 보았다.
1987년 리직한 후 남계숙은 부인과종양치료사업에 대한 깊은 애착심을 이기지 못하여 중국인민해방군 하북성 보정군분구 간부 휴양소 진료소의 요청에 수용하여 이 병원의 종양의사로 일을 보았다.
1947년 16세 처녀로 참군하여 오늘날의 이름난 산부인과 종양의사로 되기까지 그는 부단히 자기를 전승하는 인생을 살아왔 다. 40여년간 그의 손끝에서 구원된 생명이 얼마인지, 그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들인 환자들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남계숙자 신도 다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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