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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노을

太昊 2025. 11. 11. 09:06


-원 연변조선족자 치주부녀련합회 제2임
주임 차유근에 대하여-
류원무

차유근. 1926년 3월 6일 길림성 화전현 집장자촌에서 출생 8. 15광복이 나면서 혁명에 참가. 1946년 7월 1일에 중국공산당 에 가입. 1946년 10월 룡정군정대학에서 학습. 구대장, 부정치 지도원. 1947년 7원에 동북군정대학 길림부교 교부 조직간사. 동 년 11월에 룡정군정 대학부속병원 (1948년초에 중국의과대학 1분 교로 개칭.) 부지도원. 1949년 3월 중공연변지위 조직부 간사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주 부녀런합회 조직부장, 부주임직을 력 임. 1953년 1월 -1962년 6월 주임직을 담당. 동시기에 전국부 녀련할회 제2기, 제3기 집행위원으로 활약 하면서  모택동을 수박 으로 한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수차 받음. 1962년에 연변농학원당위 부서기로 전근. 문화대혁명때 주자파로 몰려 투쟁 당하고 농촌으로 추방됨. 1974년에 연변과수농장혁명위원회 부 주임. 1975년 5월에 연변농학원혁명위원회 부주임. 1978년 3월 에 연길현위 부서기. 1980년 8월에 연길현인대상무위워회 부주 임. 1983년 3월에 리직휴양.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로인협회 부 회장으로 여생을 장식하고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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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근은 열한살을 먹고서야 학교로 가게 되였다. 붕건통인 할아버지는 유근이는 물론 언니도 녀자라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 고 집구석에 앉혀놓고 천자문을 가르쳤다. 녀자는 이름자나 쓸 줄 알면 된다고, <무식이 덕>이라고 생각하는 할아버지였다. 그 러나 손자만은 일곱살이 되자 학교에 보냈다. 너무 어린 손자가 걱정이 된 할아버지는 유근이를 보모로, 보호병으로, 감독원을 로 곁달아 학교에 보냈다.
동생덕에 학교에 다니게 된 유근이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 다. 어렵사리 붙은 학교라 유근이는 공부를 이악스레 하여 해마 다 학급 1 등을 하였다. 녀자에 대한 할아버지의 차별시가 유근 이의 진취심을 분발시켰는 지도 모른다.
유근이가 3학년을 다니던 해 가을 어느날, 마을 사람들의 존 경을 한몸에 지니고 있던 허선생님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온 마 을이 허선생의 실종을 두고 술렁거렸다. 일본헌병대에 잡혀갔을 지 모른다는 말도 떠돌고 공산당 항일 런군에 갔으리라는 소문도 돌았다. 현손재지에서 15리 떨어진 집창자에서 백여리 들어가면 쟈피거우라는 골안이 있는데 거기에 공산당군대가 있다는 것이 였 다. 거기에는 녀자군대도 있는데 단발머리를 하고 각반을 치고 총을 메고 일본놈들과, 싸운다는 이야기도 이구석 저구석에서 들려 있다. 유근이는 그런 소문을 들으며 허선생님이 하시던 단군신 화 이야기, 리순신장군의 이야기, 안중근에 대한 이야기를 새삼 스레 다시 생각하게 되였다.. 열제살 소녀의 가슴은 사뭇 설레였다. 그가 존경해마지 않던 허선생님이 영웅처럼 맘속에 우뚝 솟아오르기도 하고 자피기우산 속에서 총을 메고 놈들과 싸운다는 단발머리 녀진사들이 생글거 리며 자기에게 손짓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맘때 유근이는 저도 모르게 자기의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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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였다.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때면 벌써 멀리서부터 큰 기침 을 하는 할아버지, 그 소리를 듣고 버선발로 달려나가 할아버지 를 모서들이는 어머니, 된밥이 밥상에 오르면 열번이고 밥상을 물리라고 호통치는 할아버지, 그 령을 어길세라 다시 진지를 지 어올리는 어머니...
유근이는 할아버지를 깍듯이 공경하는 어머니를 존경 하면서 도 아버지나 할아버지 앞에서 무조건 순응 하시 는 어머니가 어쩐지 가련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머니처럼은 살지 않을테야. 나이 들면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고 남편을 섬기고. 그렇게는 살지 않을거야. )
유근이는 맘속으로 다지고다졌다. 그리고는 공부에 더 열중 하였다. .봉건통인 할아버지도 둘째 손녀가 공부를 잘하니 현소재지 에 있는 동명국민고등학교에 보내 주었다. 유근이는 힘이 솟구쳤 다. 매일 왕복 30리길을 통학하면서도 힘겨운줄 몰랐다. 통학길 에 타는 나루배를 놓칠가봐 아침을 굵고 집을 나선. 날이 얼마인 치 모른다. 동명국민고등학교 2년, 그 학교 보습반 2년, 4년을 하루같이 열심히 뛰여다니며 공부한 유근이는 최우등생으로 사도 학교를 다니지 않고도 교보시험에 합격되고 교우시험에 통과되여 교원자격중을 발받게 되였다.
1944년 유근이는 교원으로 초빙되여 화전에서 백리 멀어진 북유수하자 산골학교로 가게 되였다. 이듬해엔 거기에서도 30리 더 들어가는 장가유팡소학교로 가게 되였다. 유근이는 험번고 굵주리는 산골 아이들을 정성껏 가르쳤고 고달픈 화전민들의 미 더운 벗으로 되여주었다
골이 깊고 수립이 울창한 그 지대는 일찍 항일유격대가 활 동하던 지역이였다. 화전민들과 마음이 하나로 이어진 유근이는 그때로부터 공산당과 항일유격대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게 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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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민족적의분과 적개심은 나젊은 처 녀의 가승에서 불타올랐다. 유근이는 허선생 님을 생각하면서 산 골 아이들의 눈을 띄워주기에 심혈을 몰부었다. 드디어 8. 15광복을 맞게 되였다. 새세상을 찾은 산골 인민 들은 십진가, 적기가, 최후의 결전가를 부르며 청넘동맹, 부녀 동맹을 조직하였다. 농사군의 딸로 태여나고 농사군들속에서 잔 뼈를 굳힌 지식인 차유근이는 자연스럽게 혁명의 물결속에 뛰여 들었다. 낮이면 선전삐라를 찍고 밤이면 야학교에 나가 동네 부녀들을 모여놓고 <가갸거겨)를 가르치느라 집으로 돌아가는것마 저 감감 잊고말았다. 한달동안이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 어머 니가 유근이를 찾아오기까지 하였다. .
화전에도 팔로군이 들어왔다. 민주대동맹이 조직되고 그해 겨울에는 화전군정대학이 섰다. 유근이는 혁명의 도리를 깨치고 저 학교로 가려 했지만 학부형들이 선생님이 가면 아이들은 누 가 가르치느냐며 붙드는바람에 어쩔수 없었다. 후에 촌에서 군 정대학 방청중을 얻어주어 유근이는 한주일에 두번씩 강의를 받 을수 있었다. 그맘때 고개너머 동네에서도 야학교가 섰지만.그 동네 녀인들이 녀선생이 아니면 글을 배우지 않겠다고 나누웠 다. 유근이는 자진하여 그 야학에 나가기로 하였다. 발마다 5리 나 되는 고개길을 오르내리며 그녀들의 눈을 띄워주었다.
1946년 5월에 화전에 국민당이 들어오자 팔로군은 강동으로 철퇴하여 자피거우로 들어가게 되였다. 유근이는 결연히 민주대 동맹 열성자대오에 가입하여 현정부민운공작대 대원으로 되였다 <가거라, 녀자라구 집구석만 지키겠느냐. 년 네 맘대루 보 람있게 살아봐라. >
한밤중에 대오를 따라 떠나는 딸을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배웅하였다.
현무장대가 조직되자 유근이는 소녀시절에 그려보던 단발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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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녀전사로 되였다. 총을 받아메던 그날의 그 기쁨, 그 감격 유근이는 맘속으로 다지고다졌다
<나도 오늘부터 어였한 협명전사다. 이 총으로 국민당 반동 파를 무찌르고 고해속에서 허덕이는 수천만의 로고대중을 해방시 키리라. 이 총으로 신권(  神权 ). 왕권(王权), 부권( 夫权)의 질 고속에서 허덕이며 유리당하고있는 우리 자매들의 해방을 맞아오
리라.>
키가 작은 편인 유근이는 땅에 끌리는 장총을 메고 현정부 를 보위하고 토비들과 싸우고 국민당군대를 기습하는 둥 간고한 유격전쟁의 나날을 보냈다. 그는 고달픈줄 모르고 한간 주구들 의 청산품을 팔아 식랑을 사들이고 일용품을 마련하였다. 련며칠 계속되는 밤행군 때에는 의례 제일 뒤에서 걸어가며 졸음을 못이겨 땅에 주저않아버리는 전우들을 부축해 일으키군 하였다 오로지 혁명의 신념 하나로 자신을 무장한 유근이는 1946년 7월 1일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해 10월말에 유근이는 룡정구정대학으로 추천받아 가거 되였다. 룡정군정대학에 추천받은 7명 전사중 녀자는 유근이 혼자뿐이 였다. .그들은 하늘이 보이지 않는 원시림을 련며칠 걸었 다. 날이면 토비를 만날가봐 숨어지내고 밤이면 밤마다 진대나 무를 기여넘고 돌부리를 걷어차며 걸었다. 맑스-레닌주의 진리로 두뇌를 문장하려는 단 하나의 불타는 일념으로 그들일행은 보름 만에 룡정에 대였다.
배움의 나날에 유근이는 목마른 사람이 물 마시듯 정치학습 과 군사훈련에 몰두하였다. 반장, 구대장, 정치지도원으로 승진 하였고 나중에 군정대학에 남아 조직부 간사로 되였다. 1948년 겨울에 룡정에 중국의과대학1분교 부속병원이 서자 유근이는 간 호대 정치지도원으로 가게 되였다
병원으로는 매일이다싶이 부상병들이 호송되여왔는데 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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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하꺼법에 천여명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병원어 서는 눈코뜰새없었다. 후방도 전선이나 다름이 없었다. 차유근 이 인솔하는 간호대 백여명 간호원들은 부상병들을 안치하고 붕 대를 같아대고 간호를 하느라고 거의 날마다 뜬눈으로 날을 밝 혔다. 그래도 간호원들은 륜번으로 당직을 서기도 했지만 지도 원인 유근이는 담번이 따로 없었다. 해종일 여기로 불려가고 저 기로 쫓아다니며 부상병들을 돌보고 간호원들을 거들어 주어 야 했다.
그런데 부상병들중에는 별별 부상자가 다 있었다. 전방에서 국 민당군대와 총부리를 맞대고 싸울 때는 저마다 용맹을 떨친 맹장들이였지만 .중상을 입고 불구의 몸이 되여 병상에 눕게 되자 성미들이 괴벽해져서 간호워들과 심술을 부리고 욕을 퍼붓고 행패를 부리기가 일쑤였다. 지어 어떤 부상병은 이불밑에 혁띠 를 감추어두었다가 간호원을 불러들여선 그 혁떠로 간호원의 낮 을 후려치는가 하면 페결핵에 걸린 부상병은 더러운 가래침을 고의적으로 간호원의 낮에 뱉아놓았다. 마치도 그 간호원들이 자기들을 그렇게 만들어놓기라도 한것처럼. 그래도 간호원들은 참고 견디며 그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그들의 피고름을 처치하 고 그들의 피옷을  빨아주었다. 그러다보니 정치지도원 유근이가 언제 쉴참이 있었겠는가. 성깔을 부리는 부상병을 위안해줘아지 박대받은 간호원의 속을 풀어주어야지..
우리는 부상병들의 고통을 리해해줘야 한다. 그들이 누구를 위해 피 흘리고 목숨을 바쳤는가? 그들의 아픔을 자기의 아플으 로 알고 불구자로 된 그들의 비애를 원쑤에 대한 적개심으로 바 꿔주자. 부상병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들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일이 얼마나 보람차고 영광스러운 일인가! 혁명이라는 두 글자 를 맘속에 아로새긴다면 무슨 곤난인들 극복하지 못하며 무슨
옥인들 받아내지 못하겠는가. 그들에게 사랑을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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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이의 마디마디 말은 간호원들의 맘속에 서렸던 억울함 과 역정을 가서주없다. 유근의 말이면 금방 부상병에게 얻어맞 고 눈물이 글성해있던 간호원이라도 눈물을 닦고 다시 병실로 들어간다. 우리의 라호원들의 협명각오도 전사들 못지않다. 부 상 병들에게 이밥이나 밀가루 음식을 대접하면서 자기들은 빨간 수수밥에 무우쪼각이 몇개 뜬 멀건 소금국을 마시지만 고달픔도 피로도 맘속에 묻어두고 자신을 이바지했다. 그런 그녀들이지만 사망자가 나오면 시체를 다루기 두려워 지도원인 유근이부터 찾 았다. 시체를 사체실에 두고나올 때마다 유근이는 의례 뒤에 성섰다. 자기 전사들이 원하는 일이라면 유근이는 언제나 자신을 희 생할수 있는 각오를 하고있었던것이다
사 망자는 부상병속에서만 나오는것이 아니였다. 열일곱살 난 간호원 김분옥은 페결핵으로 죽었다. 그녀가 운명하던 날 유근이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쥐고 미음을 떠넣어주었다 .
<분옥이 . 신심음 가지라구. 이 미음 발아먹으면 일어날수 있대두. 자 어서.> 분옥이는 눈물이 글성하여 가쁜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저었 다.
<언니. 넘어가지 않아요. 난 살고프지만 안될것 갈아요. 언 니. 난 원은 없어요. 고아로 자라며 갖은 천대를 다 받았지만 혁명을 해봤구나 하고 생각하면 속이 다 내려가요. 내가 결해확 자들 병실을 말아서 페병에 걸렸다구두 하지만 난 워낙 흉부가 나빴어요. 육친의 정을 나 혁명대오에 와서야 받아봤어요. •.언 니, 내 곁에 그냥 앉아주어요. ..>
얼마나 훌륭한 전사인가! 유근은 눈물을 삼키며 그녀의 운 명을 지켜주었다.
부속병원의 간호대는 차유근의 지도밑에 한사람같이 뭉쳐 죽기내기로 사업하였다. 자유와 평등을 얻은 녀성들의 전투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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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녀성해방의 가치를 높이 추켜든 녀진사들의 희생정신이 바로 그녀들의 사업열정을 안반침해주었던 것이다. -1949년 3, 부속병원이 할빈으로 옮겨가게 되자 유근이는 녀성 민족간부로 연변전원공세로 소환되였다. 녀성해방운동에 한 몸을 바치는것은 유근의 평생소원이였다. 자존, 자강, 자선, 자 립. 남녀는 평등하다. 이 세상 절반 하늘을 떠인 녀성들은 봉건 사상의 질고에서 해방되여 자신의 존엄과 인격을 찾아야만한다. 녀성들도 사회로 진출하여 로동권리, 사업 권리를 찾아야 한다. 소녀시절부터 이 길을 걸으려고 이악스레 공부하고 가정 울타리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혁명대오에 가담한 유근이기에 새로운 사업터 에서 인즘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
1952년9 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면서 부녀련합회도 조직되였다. 유근이는 선후론 부련회 조직 부장, 부주임, 주임 직무를 력임하였다. 그러다보니 스무살만 넘으면 로처녀로 보던 그 시대에 유근이는 스물다섯살에야 시집을 가게 되였다. 시집 을 가니 아이를 낳아야 했다. 그런데 유근이는 임신해도 막달까 지 하루도 쉬지 않았다. 첫몸을 풀게 된 그날도 그는 주직속기 관 당원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회의도 중에 아래 배가 아파 병원 으로 달려가니 벌써 자궁이 열리기 시작했다. 의사는 그런 그녀 를 꾸중하지 않을수 없었다. 두번째 애도, 세번째 애도 유근은 해산하는 날까지 출근하였다. 부녀들의 건강을 위하여 간 곳만 다 산전산후 56일 휴식을 보장해주라고 선전하는 그였지만 그자 신은 첫애를 낳고 보름만에 정당에 참가하기 위해 출근하였고 두번째 애때는 19일 만에, 세번째 애때는 바람을 맞은 몸인데도 30 일만에 출근하였다. 남들은 한 아이에 56일씩을 휴식하였지만 그는 세아이에 64일밖에 쉬지 않았다. 유근이의 맘속엔 오직 혁 명이란 두자밖에 없었다. 생명을 대가로 쟁취한 녀성들의 권익 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유근이기에 녀성들을 위해서라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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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는 자신의 모든것을 희생할수 있었던 것이다.. 녀성들의 질고를 료해하고 그녀들의 권익을 수호하려면 수 시로 공장, 광산, 농촌에 내려가 조사연구를 하고 문제를 발견 하고 해결책을 대야 했다. 그런데 그때만해도 출장을 가면 이불 짐을 메고다려야 했다. 어린 아이를 업고 이불집을 이고 기저귀 가방을 들고 20, 30리 길을 걸어야 하는 그녀의 하향은 말 그대 로 전투였다. 우유가루도 없던 그 세월에 유근이는 젖까지 모자 라 암죽그릇을 가지고 하향을 했다. 겨울엔 그래도 화로 불이라 도 있으니 괜찮지만 쩔쩔 끓는 여름철에 뉘집에서 하루 몇번씩 불을 지펴주겠는가. 신문지로 암죽을 데워도 보고 초불을 여러 대 켜놓고 데워도 보고... 그 신고스러움을 어찌 한마디로 말하랴.
아기를 업고 출장을 다니기도 힘겨운 일이였지만 아이들을 보육원에 맡겨두고 출장을 다니는 일도 어머니로서는 가슴이 아 픈 일이였다. 유근은 사흘이 멀다 하고 농촌으로 내려가다보니 토요일에도 보육원에 맡겨둔 아이들을 집에 데려오지 못하기가 일쑤였다. 어머니를 떨어지기 싫어 발버둥치는 어린 것을 잠재워 가만히 보육원에 맡겨두고 하향길에 오른 적은 그 몇번이던가!
어찌다 어머니를 만나면 아이들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첫 마 디가< 엄마 또 가요. >다. 유근은 그때마다 가슴이 지렸지만 그 렇다고 가정이란 자그마한 울타리를 지키고만 있을수 없는 몸이 였다. 전통관념의 질고속에서 여직 자아를 찾지 못하고있는 녀 성들이, 자기 권익을 모르고있는 녀성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 니깐. 자유근이 부련회 주임직을 맡았을 때는 사회주의건설 총로선 의 빛발아래 공농업생산이 전례없이 앙양되고있을 때였다. 녀성 들이 집에서 아이나 낳고 가마목이나 지킨다면 사회에 대한 기 여는 둘째치고 경제상에서 자립할수 없고 따라서 진정한 남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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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도 있을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녀성해방은 녀성들을 발 동하여 건설에 투신시키는것이다 그리자면 녀성들을 조직하는 동시에 그녀들의 실제곤난을 해결해주어야 했다. 유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 주 90% 농촌에 탁아소. 유치원을 세웠고 부녀로동보호기 <3조절 >법을 관철하여 임신기에는 가벼운 일을, 월 경기에는 마른 일을, 포유기에는 가까운 포전에서 일하게 하였 으며 낡은 접산법을 배격하고 새로운 접산법을 실시하였다
농촌에서 녀성들에 대한 경시는 같은 로동에 같은 보수를 주지 않는데서 집중적으로 표현되였다. 례컨대 모상판만들기로동 에서 녀성들은 온종일 머리가 빠지게 모래를 이어 날라도 고작 8부밖에 받지 못했으나 기술로동을 한답시고 남성들은 땀을 을 리지 않고도 12부씩 받았다. 밭김을 맬때  녀성들이 더 빨리 더 많이 매도 호미를 깊이 박지 못하다는 리우로 부수를 깎으려 했 다. 이런 실정에 비추어 우근은 각급 당조직에 의거하여 도리를 따지기도 하고 대비실험을 하게 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녀 성들의 경제적권익이 보장받도록 하였다. 동시에 녀성들도 남성 들에게 뒤지지 말고 생산기술을 장악해야 한다고 고무추동하였 다. 녀성들의 가무로동부담을 경감시키는것을 사상령역에서의 한 차례 해방으로 인식하고 남성들의 대장부주의를 배격하는데서도 유근은 남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1956년에 차유근은 로두구 도원촌에 내려가 끈기있게 교양 사업을 벌려 도원촌 남성들로 하여금 물도 긷고 불도 때고 집짐 승도 먹이도록 하였다. 마을에는 남편이 안해를 도와주는 새로 운 풍기가 형성되였다. 녀성들은 너무 기뻐 박수를 치며 이제야 진정한 해방을 받았다고들 하였다. 차유근은 도원경험을 전 주 에 일반화하고 매년 3. 8절이면 훌륭한 시어머니, 훌륭한 남편도 함께 표창하여 전 사회적으로 부부 쌍쌍이 서로 돕고 서로 아끼 는 풍기가 형성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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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유근은 다른 사업티에 전근되었어도 녀성해방이라는 이 대사를 한시도 잊지 않았다. 1974년 연변과수 농장혁명위원회 부 주임으로 있을 때 유근은 과수농장 남성들은 모두 로동자 대우를 받고있지만 녀성들은 남편과 함께 평생 과수를 가꾸어도 그 대 유를 받지 못하고있는 정황을 발견하고는 제때에 로동인사부문에 반영하여 시정받도록 하였다.
당의 사업에 청춘의 정열과 지혜를 몽땅 바치고 녀성해방전 렬에 나서서 자신을 희생시킨 유근이였지만 (문화대혁명)이란 폭풍속에선 주자파로 몰려 투쟁받고 나중엔 남편과 함께 농촌으 로 밀려나고말았다.
1972년 , 화통현 와통향 구백일에 내려가고보니 땅은 비옥하 였지만 무상기가 짧고 일조시간이 적은데다 인위적인 인소로 해 마다 분배때면 빛을 얼마나 졌는가를 결산하는 형편이었다. 며 나갈 능력이 있는 사람은 다 떠나가고 과부, 홀아비 가정 스물 한세대만 남아있는 구백일촌. 산나물, 산열매가 썩어나지만 집 집이 신 한절레로 살아가는 찌지게, 가난한 구백일 촌이였다.
고등학부의 부원장, 당위 부서기로 있던 그들 부부는 공산 당원으로서의 자책을 느꼈다. 과연 백성들을 이렇게 살게 하려 고 우리가 혁명을 했던가? 백성들에게 당의 혜택, 당의 따사로 움을 주지 못하고야 공산당원이란 말을 부끄러워 어떻게 입밖에 낸단말인가? 차유근 부부는 구백일에 뿌리 박고 구백일 촌민들을 번신시킬 결심을 다졌다.
유근은 남편과 함께 우선 구맥일 촌민들이 음력 설을 즐겁게 쇠게 하려 작심하였다. 산에만 올라가면 돈인데 왜 앉아서 굶겠 는가? 생활자금, 생산자급을 위해 부업을 하는것이 왜 자본주의 란말인가? 들판에 무연히 들어선 갈, 산에 덮인 목통, 강남콩받 침대감을 베서 나라에 팔면 자본주의고 그래도 두고 보면 사회주 의란 말인가? 유근은 앞장서 공소합작사에 가서 상론하고 솜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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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어다 집집에 나누어주고 산에 오르게 하였다. 불과 며칠새에 집집마다 2백~3백원씩 벌었다. <쳐다보기만해두 아찔한 고급간부들이 내려와서 우리두 살 게 되였소!! >
구백일촌 농민들은 자유근 부부와 한마음이 되였다. 농학가 인 유근의 남편(원 연변농학원 부원장) 박경환은 자기의 장끼를 맘껏 발휘하여 유지온장을 만들고 상자모를 붓고 검정 귀버섯장도 앉히고 인삼장도 앉혔다. 감자, 무우, 호박도 심을수 있는데까 지 심게 하였다. 결과 첫해 농사 분배에 구백일 촌민들은 득전 이 있게 되였다..
차유근네 집은 또 구맥일 촌민들의 은행이기도 하고 물자공 급소이기도 하였다. 촌민들은 돈이 없어도 찾아오고 석유가 떨 어져도 등잔을 들고 찾아왔다. 유근이는 장태소금을 사다가 집 집이 나눠주었다. 가는 정이 오는 정이라고 촌민들은 토장이며 토간장을 퍼들고 유근이를 찾아왔다. 순박한 농사군들의 뜨거운 정에 멍든 그들 부부의 상처가 치유되는상싶었다.   구백일에서 3년 사는 동안 차유근 부부는 말 그대로 농민들 과 고락을 같이하였다. 오보호 로인이 사망됐을 때는 시아버지 관널을 선뜻이 내놓았다. 그러다보니 정작 시아버지가 세상 떴 을 때는 세멘트관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
구백일에서 3년 사는 동안 해마다 대역곡을 먹면 구백일은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되였고 분배때면 빚 문서 대신에 헌금을 받 아쥐게 되였다. 천하 못살 곳이라던 구백일에 이사군들이 찾아 들기 시작하여 다시 30여호 동네로 되였다. 유근이는 신진사업 - 일군으로, 남편은 모범공산당원으로 표창받았다. 유근이는 인생 의 좌절을 겪었지만 잃은것보다 얻은것이 더 많다고 느꼈다. 그 들 부부가 소환되던 날, 규백일 농사군들은 그들 부부의 손을 부여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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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3월  차유근은 리직휴양을 하게 되였다. 스무살에 혁명에 참가하여 장장 38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단 하무도 쉴줄 모른 차유근. 화전땅 집장자 벽촌에서 아침노을 로 붉게 붉게 타올랐던 열혈청춘 차유근, 연변땅 어디에고 자국 을 남긴 차유근. 드디어 그녀에게 쉴 시간이 차례 졌다. 하지만 차유근은 쉴줄을 몰랐다. 로인들에게 즐거운 말년을 향수케 하 고저 로전우들과 더불어 로인협회를 조직하였다. 자치주 로인협회 부회장직을 담당한 차유근은 그제날의 그 열정 , 그 정열로 로인 사업을 추진시키고 있다. 자치주산하 각 현 시 로인협회, 향진 로인협회, 촌 로인협회에서는 생산자구로 활동경비를 마련하여 유익한 활동을 벌려가고 있다. 외로운 로인들의 환갑상도 차려주 고 명중지유람도 조직하고 ... 연변의 로인협회조직은 이미 국내외 에 널리 알려져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고 있다. 해마다 8월 15일이 되면 연변땅을 온통 춤바다로 뒤덮인다. 심산벽지 산골에서도, 석탄먼지에 그을린 탄광촌에서도, 번화한 자치주 수부 연길거리에서도 로인절맞이 명절행사가 성대히 벌어 진다. 넘실넘실 춤추며 돌아가는 로인들속에 끼인 차유근, 그녀 의 얼굴에 붉은 노을이 곱게 피여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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