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에 바친 일편단심
-두 렬사의 유가족 문원성에 대하여.
문숙동
후리후리한 키, 우렁우렁한 목소리, 어글어글한 눈매, 시원 하고 강직한 성격... 어느 모로 보나 남성다운 기질이 다분한 그 녀가 바로 남편과 외아들을 모두 혁명에 바치고 자신도 그들앞 에 부끄럽지 않게 수십년을 혁명에 이바지한 문원성 녀성이다. 그는 해방전에는 부녀회의 지도자로 활약하고 1958년부터는 송 강성 (지금의 흑통강성 동남부, 1954 년에 후 룡강성에 합병) 탕원 현 탕왕조선민족향 부향장으로 사업하였다. 그는 1951 년과 1952 년에는 송강성 로력 모범으로, 1954 년에는 흑룡강성제1기인민대 표대회 대표로 당선되고 전국소수민족참관단 성원으로 모택동주석, 주은래총리 등 중앙지도자 동지들을 만나뵈였다.
부녀회의 선비
문원성은 1909년에 조선 경상북도 안동군의 한 빈곤한 가정 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자 그는 네살이란 어린 나 이에 조그마한 다리를 힘겨웁게 옮겨놓으며 부모들의 손에 이끌 려 중국으로 들어와 길림성 액목현 (지금의 교하시) 소황지에 발
572
을 붙이고 살게 되었다. 때는 <남녀부동석>이란 봉건적 세습이 농후한 시기어서 문원성은 나이 일여덟 살이 되어도 학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래도 사상이 비교적 진보적인 부친 문목호가 아무리 너자의 몸이라도 글은 알고 살아야 한다면서 집 에서 그에게 조선글을 배워주었다. 이렇게 글을 익힌 문원성은 집구석에 보이는 글쪼각이란 다 주어 읽었다. .
당시 동북지구에는 조선족반일지사들을 위주로 하여 반일투쟁이 비교적 활발히 전개되고 부녀회, 청년회 등 진보적 군중단 체도 나왔다. 어릴 메부터 일제에 대한 원한의 씨앗을 가슴에 짝틔워온 문원성은 17 세에에 부녀회에 참가하여 반일활동에 열 성적으로 뛰어들었는데 조선글을 안다고 (선비)로 떠받들리였고 오래지 않아 부녀회의 비서직을 맡게 되였다. 당시 부녀회 활동 은 보통 보름에 한번씩 있었는데 문원성은 매달 한사람이 20전 씩 내는 회비도 책임껏 받아 적어두었다가 혁명활동에 쓰군 하 였으며 야학에 나가 눈뜬 소경인 조선족녀성들에게 열심히 글을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부녀회에서는 또 종종 리론학습도 조직하 고 토론회도 가졌는바. 이때마다 그는 일제의 침략과 반동당국의 암흑한 통치를 폭로, 규탄하는 진보적 반일인사들의 연설을 귀가 솔깃하여 들었고 나라 잃은 설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러는 가운데서 문원성은 로씨야10월 사회주의 혁명의 한길을 따라 일제 를 타도하고 민족해방을 전취하는 앞길이 점차 훤히 트이는 것 같았다.
항일투사의 안해
지금 료녕성 청원현 초시진에 자리잡고 있는 문원성의 집에 들어서면 금빛액틀에 넣어 벽에 나란히 걸어놓은 두개의 렬사증 -이 맨먼저 눈길을 끈다. 항일투쟁의 불길속에서 조선민족의 해
573
방을 맞이하기 위하여 일제의 감옥에서 장렬히 희생된 리성철이 바로 문원성의 남편이고 항미원조에 나가 조선전쟁의 포연속에서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다 바쳐싸운 리준섭이 또한 문원성의 외 동아들이다.
문원성은 19세때 액목현 신잔에 사는 리성철이란 청년과 결 혼하였다. 결혼한지. 엿새만에 리성철은 사랑하는 신혼안해를 부 모결에 남겨두고 홀몸으로 간도성(지금의 연변)으로 떠나 학업 을 계속하고 민족해방의 길을 찾으려고 룡정 대성중학교에서 고 학하였다. 당시 간도일대는 조선족 조기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맑 스-레닌주의가 광범히 전파되였고 대성중학교 또한 청년일대를 진보적 반일인재들로 양성하는 중심지로 되여있었는지라 리성철 은 이러한 환경속에서 가물에 단비를 맞은 곡식마낭 혁명리론을 탐욕스레 접수하고 1928년 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고 대하던 방학이 되여 리성철이 연길에서 신잔까지 600리길을 걸 어 집에 와도 일제 순경의 감시가 심해 집에서 묵지 못하고 밖 에서 숨어다녔다. 한번은 벼ㅎ훑으러 들판에. 갔던 문원성이 논판 에서 벌떡 일어서는 사람이 있기에 깜짝 놀라 여겨보니 바로 남 편이였다. 그는 남편의 품속에 쓰러져 호느끼며 부부생활에 행 복은커녕. 언제나 남편의 안전에 가슴을 옥죄이게 하는 암흑한 세상을 저주했다
대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리성철은 농사짓기 를 업호로 하여 계속 혁명활동을 벌렸다. 대성학교에서부터 조 선공산당 만주총국과 련계를 갖고있던 그는 미구에 조선공산주의 청년회 신잔지부를 성립하였다. 상급 당조직의 지시에 좇아 군 중들에게 협명리론을 선전하고 진보적군중단체들을 묶어세우기 위하여 그는 때로 낮과 밤음 이어가며 낮은 초가집에서 등잔불 을 켜놓고 글을 쓰고 선전빠라를 찍군 했다. 구차한 살림에 둥 잔불 기름마저 끔찍히 아끼는 그의 어머니였지만 아들이 하는
574
일을 장하게 여기여 밤을 새워가도 잔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문원성도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바삐도는 남편을 힘껏 뒤받침해 주면서 때론 그를 도와 선전품을 나르기도 하고 글을 베껴쓰기 도 하였으며 망을 봐주기도 했다.
1930년 리성철은 여러 둥지와 함께 길림성 교하일대의 첫 당조직인 중국공산당 신잔지부를 성립하였으며 제1임 지부서기로 당선되였다. 그들의 조직활동은 극히 비밀적이어서 그의 가정에 서도 그가 공산당원인줄을 몰랐었다. 한번은 그가 집을 떠난 뒤 문원성의 방에
발랐던 벽지가 필럭필럭 떨어지면서 그뒤에서 문 건들이 떨어져나왔다. 문원성이 찬찬히 펼쳐보니 당지부의 회의 기록, 선전품 등이였다. 그제야 남편이 공산당원인줄을 알게 된 문원성은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그 문건들을 기름종이에 싸서 터밭 한구석에 소중히 묻어두었다..
1930년 7월 , 리성철은 상급의 지시에 좇아 교하일대의 <8.1 농민봉기>를 조직, 지도하였고 그 후에는 연변지구로 가저 중국 공산당 연화현(지금의 연길현, 화룡현) 위원회 위원 겸 군자부장 으로 당선되여 반일 무장대 오를 건립해서 일제와 무력투쟁을 벌렸 다. 이듬해 리성철은 친일주구의 밀고로 용정주재 일본사령사관 순경들에게 체포되어 조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3년간 감금되여 있다가 26세의 젊은 나이를 일기로 일제의 손에 살해되였다. 당 시 일제는 그의 사진을 (동아일보)에 내고 이 소식을 저희들의 빨갱이토벌공로라고 크게 보도하였다. 지금 할빈에 있는 동북렬 사기념관에 전시된 리성철렬사의 사진이 바로 그때 <동아일보>에 기재되었던 사진이다.
남편이 피살되였다는 소식을 접했으나 문원성은 여섯 살난 아들 준섭이를 데리고 먼길을 떠날수 없었다. 하여 사아버지인 리곡산이 서울로 가서 삼각산아래에서 아들의 유골을 찾아 화장 한후 한자에 5전짜리 무명포를 사 그의 골회와 의복, 서한 등
575
유물들을 싸서 고향으로 가져와 당날 저녁으로 강건너 동산기슭 에 고이 묻었다. 근 반세기가 지난 1981년에 교하현 당조직에서 는 리성철렬사의 묘를 신잔에서 교하현동산 렬사묘로 이장하였다. 화환속에 서있는 비석에는 <길림성 교하 신잔사람, 항일렬사 리성철 > 이라고 새겨져 있다
국제주의전사의 어머니
남편을 여윈후 문원성은 적들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1935년 에 시부모들과 함께 송강성 오상현 하도툰으로 이사하였다. 미 구에 시아버지 리곡산도 반일죄로 일제에게 체포되여 높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자결하고말았다. 이리하여 년로한 시어머니, 철 모르는 시누이 둘, 어리 아들, 이 한가정을 유지하는 중책이 문 원성의 두어깨에 놓여졌다. 그래도 문원성은 어떻게든 외동아들 준섭 이를 훌륭히 자태워 남편과 시아버지의 워쑤를 갚으러는 일 넘 으로 농사를 지으며 억척스레 일하여 가정을 이끌어나갔다 하여 강덕 7년(1939년) 당지 조선문 신문은 <독농녀걸-문원성 녀사>란 제목밀에 다음과 같은 보도를 싣기까지 하였다.
< 녀사는 아직 30을 갓 넘는 청상이다. 리곡산은 그의 시부요, 리원동은 그의 남편인바 벌써 남편을 여 원지 10년이 넘었고 오직 일점혈육인 애아 준섭(12세) 을 데리고 고투를 계속한다. 모든것을 잊어버린 그에게 눈물과 설음인들 없다고 하랴. 그러나 그에게는 세상을
걸어가는 국센 험과 용기가 있고 희망이 가득하다. 항 도툰에다 8쌍의 광대하 토지를 경작하여 독농가로서의 빛나는 업적을 내여 일반의 칭송이 자자하다. 누가 녀 자를 약자라 하더냐. 그는 남자이상으로 근로하여 쓰린 세고에서 승리의 기쁨을 얻는 모범의 녀걸이다. >
576
50여년전 신문에서 오려낸 이 기사에 언급된 <리원동>이란 바로 문원성의 남편 리성철의 원명이고 <남편을 여원지 10년이 넘었 >다는것도 잘못 계산된것이지만 어쨌든 주인공 문원성이 그 때도 성격이 강직하고 일을 걸싸게 하여 소문이 자자했던것만은 틀립없다
1945년, 나라 잃고 설음 많던 조선족인민들은 드디여 광복 의 날을 맞이했다. 1946년 봄, 문원성은 참군동원 사업을 하면서 18세 나도록 애지중지 키워온 외동아들 준섭이를 아버지의 뜻을 이으라고 눈물을 머금고 신변에서 떼내여 당시 수하에 자리잡고 있던 송강성 군정대학에 보냈다. 그후 문원성이 송강성 민운공작 대 대원으로 할빈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이미 부대에 배치받은 준섭이가 저녁무렵에 할빈에 있는 민운공작대 교도대에 들렸다는 기별이 왔다. 사랑하는 아들이 보고싶어 문원성은 그날 밤으로 당장 가서 아들을 만나려 했으나 교도대의 정치주임이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래일아침 말미를 맡고 가라고 만류했다. 문원성 이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다싶이 하고 이튿날 새 벽으로 청가를 맡고 교도대에 가보니 아들 준섭이는 이미 아침 여섯시차로 할빈을 떠나고 없었다. 이렇게 1946년도 봄에 아들을 혁명사업에 내보낸후 한번도 다시 만나보지 못한채 문원성이 수년후에 받아 든것은 아들이 1951년 항미원조중에서 희생되였다는 렬사증뿐이 였다. 문원성은 그때 자신의 쓰라린 심정은 무엇이라 말로는 표 달할수 없다고 하였다.
생산건설에서의 선줄군
광복후 문원성은 그동안 끊어졌던 당조직과의 련계를 회복 하고 지방사업에 열성적으로 달라불었으며 미구에는 오상현 안가 지구 13개 촌의 부녀주임으로 활동하였다. 일본놈들이 갓 쫓겨
577
나고 인민정권이 일어서면서 조직에서 할일은 수없이 많았다. 문원성과 동지들은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부대에 보내느라,, 웅균우속( 拥军优属)과 전선지원 활동을 조직하느라, 토지개혁과 생산운동을 벌리느라, 야학을 꾸리느라, 부녀회 활동을 하느라, 적들의 파괴활동을 방지하느라 하면서 매일 새벽부터 저녁 늦게 까지 바쁘게 보냈다. 그래도 문원성은 해방맞은 기쁨에 벅차 힘 든줄을 몰렸다.
1946년 부터 1917 년까지 문원성은 할빈에 있는 송강성 민운 공작대에 참가하여 토지개혁, 토지분배 등 사업에 적극 참가하 였으며 1947년 3월 1 일에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참가하였 다. 당시는 토비들이 육실거릴 때여서 인민군대에 위문갈 때는 위문할 돈을 비누속에다 꾸겨넣거나 몸에 감추어가지고 큰 외투 를 입고 남성들의 보호하에 차에 오르군 하였다. 상지, 연수, 오상 등 현의 농촌에 내려가 사업할 때면 조선족 농민들은 미리 에 조선비녀를 꽂은 문원성을 특히 반겨주었다. 문원성은 그들 에게 이제는 일본놈이 망했으니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 되고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고, 마음놓고 농사 지으라고, 지으면 다 우 리의 것이 된다고 하면서 변신한 농민들의 마음을 안착시키고 그 들의 생산열정을 불러일으켰다.
1948년 당조직에서는 문원성을 탕원현 조선족 후방지부로 조동지켜 흥기촌에서 사업하도록 하였다. 당시는 그 일대 13개 촌에 총적으로 당지부가 단 하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문원성 은 활발하게 당조직사업을 벌려 오래지 않아 홍기촌의 첫 당지 부를 성립하였고 조직위원으로 당선되었다. 그 외에도 촌의 생산 대 부대장, 부녀주임, 위생원, 탕원현위원회 상무위원 등 직무 를 겸했다.
1950년 송강성에서는 호조조가 실시되였고 농업생산고조가 . 일어났다. 그때는 아직 농업에서 기계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때
578
였다. 한번은 문원성이 길림성 교하현에 볼 일이 갔다가 점파기가 희한하게 씨를 잘 넣는것을 보고 자기 돈으로 한대 샀 다. 그런데 그 큰 기계를 가져오기 힘들어 할수없이 뜯어가지고 보 따리에 싸서 탕원으로 이여왔다. 그 기계를 뜯을 때도 다시 맞출때를 넘려하여 종이장을 앞에 .펴놓고 부품들 어느것을 먼저 뜯고 어느것을 후에 뜯고 어느것이 왼쪽에 있던것이고 어느것이 오른쪽에 있던것인가를 상세히 적었다가 돌아와서 맞출 때도 딱 그대로 다시 맞추었다. 이 점파기를 먼저 조에서 실험해보고 후 에 촌에서 또 실험해본 결과 빈사리가 없이 파종질이 좋고 김매 기가 혈한가 하면 가을에 생산량도 전에 산종하던데 비해 훨씬 높았다. 그리하여 홍기촌에서 점파기를 사용한것이 송강성의 중 시를 받게 되였고 이 기계를 견본으로 삼아 공장에서는 점파기 를 대 량적으로 제조하여 그 일대에 보급시켰다. 공장에서 기겨 를 제조할 때 문원성이 고문으로 초청되것은 물론이였다. 이 해 에 문원성은 농업기계화의 앞장에 썼다 하어 송강성 로력모법으 로 당선되였으며 상으로 버종자까지 타 안았다.
생산을 발전시켜 전선을 지원하여 해방구를 건설하는 사업 은 더욱 많은 녀성들을 생산로동과 사회활동에로 불렀다. 녀성 들의 실제곤난을 풀어주고 애어머니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문원성은 어떻게 하나 탁아소를 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해빛 잘 드는 방을 몇개 빌러 수십명의 어린애들을 한데 모아놓으니 정 말 가관이였다. 어린애들을 잘 보살펴주기 위하여 문원성은 공산당원, 공청단원과 적극분자 몇을 동원하여 보모를 시켰다
애어머니들은 처음으로 애를 떼놓고 일하러 나가려니 한편으로 시원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미덥지 못하여 탁아소 울타리밀에서 서성거리며 들여다 보기도 하였다. 문원성은 첫 며칠간은 부녀회 간부들까지 동원하여 보모를 도와주게 하고 또 자기 돈으 로 놀음감까지 사서 탁아소에 보내주었다. 어린이들은 재빨리
579
습관이 되여 잘 놀았다. 문원성은 또 애어머니들이 젖먹이러 오 가기에도 편리하고 집에 가 밥짓기에도 좋으라고 마을가까이에 부녀들 논을 따로 떼여주었다. 그랬더니 너성들은 해방맞은 오 늘 어린애까지 마음놓고 떼놓고 집 가까운데서 일하니 정말 성 수난다고 하면서 생산로동에 더욱 열성적으로 뛰여들었다
탁아소를 꾸려 재미를 보자 문원성은 촌간부들과 토론하여 유치원까지 꾸렸다. 집에서 장난만 하던 코흘리개들을 한데 모 여놓고 선생님이 데리고 유희도 하고 <1, 2, 3, 4>, <가, 갸 거, 겨)도 배워주니 녀성들은 더욱 기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홍기촌에서 꾸린 탁아소와 유치원이 그리 좋더라고 소문은 빨리도 퍼져 탕원현 기타 촌에서뿐만아니라 다른 현에서까지 부 녀간분들이 와보고 돌아가서 분분히 탁아소와 유치원을 꾸렸다 이렇게 문원성은 탕원현에서 제일 먼저 탁아소와 유치원을 꾸려 한족들속에서도 조선족들의 낮을 빛내웠다. 그리고 조선족농민들 의 알뜰한 일솜씨로 탕왕조선민족향의 수전산랑은 수년간이나 전 탕원현 농업산랑의 1/3이상을 차지하여 형제민족의 감탄을 자아 냈다.
문원성은 일편단심 혁명을 위하여 모든것을 이바지하여왔고 맡은바 사업에서 빛나는 업적을 쌓아 1952년 9월에는 전국소수 민족참관단 성원으로 북경에 가 국경절 경축행사에 참가하고 모택동주석 . 주은래총리 , 둥영초동지 등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을 만나뵈였고 1952년과 1953년에는 송강성 로력모범 으로, 1954년 에는 흑룡강성제1기인민대표대회 대표, 흑룡강성혁명렬구속모범 으로 당선되였으며 1954년 부터는 흑룡강성 탕원현 탕왕조선민족 향 부향장, 향 부녀주임, 향 위생위원 등 직을 겸하고 헌신적으 로 사업하면서 새로운 업적을 이룩하였다. 만년에 그는 병으로 휴양하고 지금은 원래 륙촌조카이던 양자 리창섭 일가의 지극한 효성을 받으며 행복한 만년을 누리고있다
5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