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희생시킨 녀인
군인가족 리홍옥에 대하여
차정현
리홍옥은 1923년 12월 4일에 길림성 해룡현 산성진의 한 빈 한한 시민가정에서 태여났다. 부지런하고 마음씨 고운 그녀의 아버지는 조선사람이 경영하는 진정미소에서 일을 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홍옥이가 한살도 못되여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홍옥 이와 8살난 그의 오빠는 계모의 슬하에서 자라났다. 계모는 홍 옥이를. 친딸처럼 무척 사랑해주었고 알뜰히 돌봐주었다. 1939년 홍옥의 가정은 생활을 유지해나가기 위하여 산성진 에서 중화향 삼팔석촌으로 이사하여 지주의 땅을 부치며 살아나 갔다. 홍옥이도 허약한 몸으로 부모를 도와 농사일을 하였다. 1940년, 17살난 홍옥이는 부근마을의 한 총각과 결혼하여 이지 러져가는 초가집에서 가정을 이루었다. 어데 가나 지주의 땅을 부 쳐사는 신세라 시집 역시 여섯식구가 입에 풀칠하기 , 어려웠 다. 생활이 어려울수록 그들 신혼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 와주며 고락을 갈이하였다.
` 1945년 8.15해방후 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이 매하구로 왔다. 얼마 안가서 홍옥의 남편은 혁명사업에 참가하여 집을 떠 났다. 홍옥이는 비록 몸은 약했지만 집기둥이 되여 물불을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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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않고 억세게 일하였다.
1946년 5월, 국민당군대가 매하구를 점령하자 우리 당은 매 하구에서 전략적후퇴를 하였다. 당은 홍옥의 남편에게 화성촌에 남아 지하혁명사업을 하게 하였다. 홍옥의 남편은 홍옥의 적극 적인 지지하에 지하혁명사업을 줄기차게 벌리였다. 홍옥의 남편 은 백색테로속에서 재치있게 선후하여 6번이나 매하구를 드나들 며 적정을 탐지해음으로써 당에서 준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였 다. 그후 내부의 변절자로 하여 그녀의 남편은 신분이 발각되여 부득불 해방구로 전이하여 유격투쟁을 견지하여야 하였다. 홍옥 이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적점령구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될 형 편이였다. 우리 군의 군인가족으로서 적점령구에서 살아간다는것 은 그야말로 조련치 않은 일이였다.
남편의 사업을 위하여 그녀 는 자신을 희생시킬 비장한 결심을 내리였다.
1946년 7월의 어느날, 어슬녁에 그녀의| 남편은 어둠을 리용 하여 그녀의 집으로 와서 일곱식구를 몽땅 해방구로 이사시켰다. 그들은 가산을 몽땅 던져버리고 알몸으로 적점령구를 용하 게 빠져나와 해방구인 행령구 삼합촌에| 발을 옮겨놓았다. 그러 나 생각과는 달리 며칠 안돼서 정세가 급변하여 삼합촌에도 국민당군대들이 쳐들어왔다. 홍옥의 남편은 아군 류하진 제3종대 7사에 편입되여 새로운 정찰임무를 맡았다. 그들 부부는 혁명사 업을 위하여 또 갈라져야 하였다.
그리하여 홍옥의 남편은 부대로 갔고 홍옥이는 임신한 몸으 로 3살난 어린애를 업고 머리에는 보짐을 이고 대후방인 류하방 향으로 떠났다. 비바람을 안고 높고 험한 산비탈을 숨가쁘게 오 르내리고 진창길을 한발자국 한발자국씩 옮길 때마다 그녀에게는 얼마나 의력이 수요되였는지 모른다. 그녀는 교박 9일을 걸어서 야 팔도강에 이르렀다. 발에는 물집이 생겼고 다리맥은 다 풀렸 으며 다리는 팅팅 부어 뻗짱다리가 되여 일어서서는 앉을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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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고 앉아서는 일어설수가 없었다. 그녀는 평생처음으로 이런 고통을 받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흐느껴 울어본적이 없었고 남편을 원망해본적이 없었다. 팔도강에 이르러 며칠 휴식한후 조직의 배치에 의해 야전군 병원에서 림시로 상병원을 간호하게 되였다. 전쟁 시기의 야전군 병원의 조진은 극히 간고하였다. 치료조건도 간소했을뿐아니라 식량도 부족하여 강남죽을 끓여 먹어야 하였다. 멀건 강낭죽을 한술한술 환자에게 먹여주는 그녀의 가슴은 칼로 에이는듯 아 팠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였다. 그녀를 지 켜 보고있던 상병원들이 감동되여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 소리에 놀란 의사들이 어느 환자가 숨이 졌는가 하여 뛰어들어왔다. 그 녀는 친혈육을 대하듯 환자를 정성껏 돌봐주었다. 한번은 한 상병원이 변기에 앉아 대변을 보다가 그만 변기우에 주저앉아 변 기가 박산이 나서 온 영치와 옷에 대변을 뭉개놓았다. 이 때도 그려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상병원의 몸을 깨끗이 씻어주 고 또 속옷까지 몽땅 벗기여 깨끗이 씻어주었다. 이런 그녀를 상병원들은< 리 아주머니>, (리누나) 하고 친절히 불렸다. 한달 사이에 정세는 더욱 긴장하여 졌다. 병원을 대 후방으로 철거해야 하였고 일부분 백성들도 철거해야 하였다. 그녀는 난 민들을 데리고 럼강으로 갔다. 림 강에서 며칠이 안되여 조직의 지시에 의해 또 장맥현으로 철거하였고 장백현에서 장백, 무송 접경지대인 만강으로 철거하였다. 만강으로 가는 길은 더욱 험 악하였다. 그녀는 새벽에 길을 떠나 온종일 굶으면서 아이를 업 고 걷고걸어 밤중에야 한 농가에서 주숙을 하였다. 지칠대로 지 친 어른들은 배가 고파서 미칠 지경이였고 아이들은 기를 쓰며 울어대였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우는 아이를 업고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 수백리길을 걸어 마침내 삼도묘령에 이르렀다. 삼도요령은 깊은 두메산꼴이였다. 두서너집씩 여기저기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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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자연툰을 이루고있었다. 조직의 배치에 의해 홍옥이 모자는 무너져가는 빈 초가집에 정착하게 되였다. 어느덧 계절은 바뀌 여 눈보라치는 겨울이였다. 외롭고 고독한감이 그녀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물 한번 흘리지 않았다. 임신한지 8개월이 된 홍옥이는 조직에서 내주는 강낭쌀을 끓여먹어가면서 간고한 생활을 하였다. 무송의 동지섣달의 추위는 매우 맵짰다. 설한풍이 휘몰아치는 겨울에도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홀옷바람으 로 산으로 올라가 떨나무를 찍어와야 하였다. 손발이 얼어터져 피투성이가 되였고 치마자락은 갈기갈기 찢어져나가 허리밖에 남 지 않았다. 둥에다는 나무를 지고 한손으로는 아이를 이끌며 한 발자국한발자국 산비탈을 내려오는데 까딱 잘못하면 미끄러멸어 져 어느 눈속에 영영 매장될지 몰랐다. 그야말로 소름이 끼치는 생활이였다. 그런가 하면 그녀는 또 울퉁불퉁◦얼음이 깔린 우물 가에 가서 물을 길어와야 하였다. 남편과 리별한지 7개월만인 갓 설을 쇤 어느날, 홍옥이는 밤새도록 혼자 모대기다가 밤중이 넘어서야 찌그러저가는 초가집 등잔불도 없는 칠흙처럼 캄캄한 방에서 두번째 아이를 낳았다. 새생명은 너무도 모대기여서 울 음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고 겨우 숨만 붙어있었다. 따뜻한 물 한모금 마셔보지 못한 산모는 기진맥진하였으나 혼자서 깨끗이 처리하고 좀 숨을 돌렸다. 이옥하여 날이 회분이 밝아왔다. 그 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부억에 나가 강낭죽을 끓여 모자가 먹 었다.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신생아는 하루도 못살고 그날 오후 숨을 거두었다. 홍옥이는 누데기로 죽은 아이를 고이 고이 싸서 웃목에로 밀어놓았다. 어둠이 지자 4살짜리 아이가 잠이 들었다. 그녀는 살금살금 일어나서 누데기로 싼 죽은 아이 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풍풍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깊은 산골 로 들어간 그녀는 손으로 눈을 헤치고 죽은 아이를 파문어놓고 내려왔다. 그녀는 앞이 캄감하였고 다리가 후둘후둘 떨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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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려 한발자국한발자국 눈속을 빠져나와 겨우 집까지 왔 다.◦집에 들어선 그녀는 깜짝 놀랐다. 어린아이가 깨여나 엄마 를 찾으며 울다가 눈물범벅이 되여 문턱에 걸터앉아 잠이 들었 던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끌어안고 아래목으로 올라갔다. (전방 에서 싸우고있는 남편의 사업을 지지해주기 위하여, 이 철없는 귀여운 아들을 위하여 이를 악물고 내가 살아나아가야 한다.".. 난관을 물리치고 억세게 살아나아가야지..)
어느날 저녁, 부엌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홍옥이> 하는 귀익은 소리가 들려왔다.너무도 돌연적이여서 그녀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멍청하니 있는데 아들이 <아버지> 하고 일어섰 다. 그들 모자의 행방을 몰랐던 남편이 갈라진지 7개월이 넘어 서야조직의 지시에 의해 갖은 골절을 거쳐 그들 모자가 거처하 고있는 삼도묘령까지 찾아왔던것이다. 그이튼날, 홍옥이는 남편 이 벗어준 군대솜외투를 입고 아이를 끌어안고 남편이 끄는 썰 매에 앉아서 눈길을 헤치며 산길을 떠났다. 저녁에야 무송현성 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조선민주련맹의 조직이 그들 일가를 반 가이 맞아주었다. 홍옥이 모자는 반년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뜨 뜻한-구들에 앉아 차려다준 전병에 뜨끈뜨끈한 두부국을 맛있게 먹어보았다. 이튼날, 그들 세식구는 다시 출발하여 발길을 재촉 하여 저녁에 정우현 화원촌에 이르렸고 사흘째만에 정우립장에 이르렀으며 나흘째만에 정우현성에 이르렀다. 계속 발길을 재촉 하여 룡천진, 휘남현 룡만촌을 지나 소금천에 이르렸고 8일을 꼬박 걸어서야 목적지인 류하현 강가점촌에 이르렀다.
강가점촌은 조선족부락이였다. 촌간부와 백성들은 그들 세 식구를-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 홍옥이 모자는 한 농민의 집에 배치되여 생활하게 되였다. 따뜻한 구들을 비워주었을뿐아니라 식량, 가구까지 마련하여주었고 지어는 수전 3무를 떼여주어 백 성들이 대신 다루어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녀는 해방구의 인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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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인민이며 해방구는 자기 집과 같은감을 절실히 느꼈다.
1947년 매하구가 재차 해방되였다. 매우 흥분된 홍옥이는 방금이라도 수리개가 되여 훨훨 납편결으로 날아가고싶었다. 6 월의 어느날, 홍옥이는 남편이 데리러 오기가 바쁘게 아이를 데 .리고 보따리를 이고 남편이 사업하고있는 매하구까지 걸어갔다. 그들 세식구는 여기서 잠시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1950년 1월, 그녀는 역시 극히 간고한 생활환경에서 혼자서 세번째로 해산하였다. 그때 그녀의 입술은 터져 피가 흘렸고 다 리는 팅팅 부었으며 전신이 부중병에 걸러 생명이 매우 위급하 였다. 그녀의 남편은 조직의 도움을 받아 현정부에서 돈 200만 원(동북페)을 꾸어가지고 부랴부랴 심양의과대학병원으로 와서 치료를 받게 하였다. 3개월간의 치료를 받고 퇴원하여 건강이 회복되기도전에 그녀의 남편은 항미원조에 참가하게 되였다. 홍 옥이는 남편을 전선으로 보낸후 자기는 아이를 데리고 다시 화 성보촌으로 이사 하여 왔다.
1953년, 3년만에 남편이 전선에서 돌아와 조직의 배치에 의 해 료양에 있는 료녕성 제2건축회사에서 과장사업을 하게 되였 다. 이때도 그녀는 짐을 꿍져이고 아이를 업고 기차에 올라 혼 자서 남편의 직장까지 이사해왔다.
`1954년 봄, 남편이 북경으로 사업이동을 하게 되자 역시 홍 옥이는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료양에서 북경으로 이사해왔다. 3 년간의 북경생활은 그들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뜻깊은 행복한 생활이였다. 그녀는 평생처음으로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꽃피는 생활을 했던것이다. 1957년, 그녀의 남편은 조직의 배치에 의해 산서성 태원으로 사엽이동을 하게 되였다. 이때 홍옥이는 어린 아이 셋을 데리고 혼자서 길림성 매하구로 이사하였다. 그후 홍 옥의 남편은 조직의 관심하에 통화전원공서 처급간부로 사업하게 되였다. 남편이 자주 집으로 오기는 했으나 늘 나가 사업을 하 570
였기에 가정의 모든 부담은 홍옥의 두어깨에 눌려있었다.
1969년 , 홍옥이는 당의 호소를 받들고 지원하여 아이 넷을 데리고 화성보에 내려갔다.
불타는 해방전쟁시기 파란곡절을 격으면서 억세게 살아온 그녀는 과로하여 끝내 몸져눕고 말았다. 1970년 1월 부터 그녀는 심장병으로 인하여 현병원에 3차례나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는 점점 위급하여 갔다. 자기의 생명이 꺼져간다는 것을 예감 한 홍옥이는 며느리를 맞아들여올것을 소원하였다. 홍옥의 간곡 한 소원을 풀어주기 위하여 현의 친구들한테서 돈 60원을 꾸어 며느리에게 솜외투를 하나 사입히고 농짝을 뒤져 그녀의 남편이 입던 홀옷 한벌을 추려 아들을 입혀 결혼식을 치렀다. 아들이 결혼한지 10 여일이 지나 그녀는 또 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1971년 2월 , 그녀는 48세를 일기로 끝내 숨을 거두고말았다. - 그녀는 참말로 당과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남편의 혁명과 모든 사업을 힘닿는데까지 지지하여 주었다. 그의 남편은 치렬한 3년 해방천쟁시기, 항미원조 전쟁시기, 사회주의 건설시기에 기여한 였으며 통화전원공서의 처급간부로 사업하다 1976년에 리직하였 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충성을 다한 현처랑모였다. 아이 여섯을 혼자서 낳았고 여섯번 이사를 했는데 다섯번은 혼자서 이사했다. 백색테로속에서 수시로 희생될 각오를 하고 남편의 뒤바라지를 잘했으며 혼자서 아이들을 키워냈다. 그녀는 고생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로서 자존, 자립, 자신, 자강의 고상한 정신으로 참된 삶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 리홍옥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 퍼지자 그를 아는 사람치고 통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남편의 혁명사업, 사회주의 건설사업을 지지해주기 위해, 당 과 인민의 사업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리홍옥의 고상한 정신은 뭇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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