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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걸어온길

太昊 2025. 10. 6. 10:20


그들이 걸어온 길

혁명가정에서 성장한 김로와

언니 위나에 대하여

지관용

올해 73세에 나는 김로녀사는 철학적인 사색을 많이 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녀인이였다. 온화하고 겸손한 성격에 록음속의 호수물같이 깊은 지혜와 믿음을 주는 녀인이다.
그는 자기보다 언니의 사적을 쓰라고 하면서 언니 위나를 추천하여주었다. 아버지가 일본특무에게 암살당한 일을 말할 때 로인은 갑자기 격동되여 호느끼였는데 그 정경은 나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였다.
이무렵 나는 김로녀사에게서 책 세권을 보았다. 하나는 의 소 학박사였던 부친 김필순(金弼淳)이 1909년에 쓴 의학서적이였고 다른 하나는 셋째고모 김필례( 金弼礼 )의 일생을 쓴 <교육의 길 신앙의 길•김필례, 그 사랑과 실천>이고 또 하나는 그의 둘째 고모부 김규식 ( 金奎植 )의 시집 < 양자유경( 扬子幽景 )>이였다.
한사람의 일생을 안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취재 가운데 김로자매에 관한 얼마간의 자료를 얻게 되였으나 그것은 실로 만경창파의 한방울 물에 불과한것이였다. 그러나 나는 이 이슬방울에서 우리 민족의 수난의 력사와 그속에서도 령룡히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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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있는 민족의 정기를 느끼고 격동으로 끓는 마음을 걷잡을수 없었다.
      가.   계
김로의 관향(贯乡)은 광산 (光山)으로 서울에서 대디로 명 성을 떨치던 명문거족의 집안이였다. 김로의 고증조부는 삼형제 분이였는데 참판벼슬에까지 올랐었으나 당시 부패한 조정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로 형제들과 상의했 다. 하여 자리잡은 곳이 서울에서 삼백팔십여리 떨어진 황해도  장연군(长渊郡) 대구면(大救面) 송천리(松川里), 일명 <소래마을>이라 불리던 곳이였다. 이 소래마을은 불타산 < 佛陀山 >을 병 풍삼아 그앞으로 드넓은 들판이 펼쳐져있었고 들판이 끝난 곳으 로는 가없는 해변이 이어져있었다. 여름철휴양지로 볼리우리만큼 아름다운 이곳에서 김로의 증조부와 조부와 아버지가 길이길이 살아왔던것이다. 아버지 김필순은 5남 5녀의 10형제중 다섯째, 아들로는 넷째였다. 김로의 조모는 조부 김성섭(金圣蟾)의 후실 이였는데 그러므로 아버지 김필순의 친동기로는 그밑으로 김구례 (녀), 김순애(녀), 김필례(녀)가 있었다.
큰고모 김구례(金求礼, 혹은 金具利亚로 불리움.)는 뒤에 서병호(徐丙浩)와 결혼하였는데 서병호의 집안과 그들 광산김씨 의집안이 혼인을 맺음으로써 소래마을에는 한국의 최초의 교회 가 설수 있게 되였다. 고모부 서병호는 중국, 상해에서 신한청년 당 (新韩青年党) 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여 독립운동을 한 한국 근대사의 한 봉우리이다.
둘째고모 김순애(金淳愛)는 김규식 박사의 부인이 되였는데 그 이름도 빛나는 유사 김규식(尤史 金奎植)은 중경(重庆)한국림시정부의 부주석이였으며 저명한 학자, 애국자, 세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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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한국근대사에 우뚝 서있는 분이다.
셋째고모 김필례(金弼礼)는 세계적으로도 추앙받고있는 한 국교육사에 길이 남을 철저하게 실행적인 교육자, 애국자, 민족 주의자이다. 아버지 김필순은 15세때 그보다 세찰이상의 정씨(郑氏)와 결혼하였는데 그 원인은 아버지가 결혼하게 되면 조부의 병환이 낫게 되리라고 모두가 인정하였기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버 지가 결혼한지 석달만에 조부는 세상을 하직하였고 그러자 조부 의 전실의 아들들이 김로의 조모와 그 가족들을 집에서 내쫓았 다. 강의한 성격이였던 조모는 식구들을 데리고나와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갔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짓고, 베를 짜고, 방 아찧고, 두부를 만드는 등 조모는 실로 못하는 일이 없었다. 김 로의 어머니 또한 강의한 녀성이였다. 시집온지 석달만에 시아버님이 세상뜨고 아씨(少奶奶)의 위치에서부터 전락한 운명이였 던 어머니는 처음엔 일솜씨가 서툴었으나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의 방조하에 재빨리 걸싼 일군으로 되였다고 한다. 김필순은 일찍  부터 집을 떠나 당시의 유일한 신식학교였던 서울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사람 에디슨박사가 세운 제중원(济众院)에서 일하 면서 의술을 배워 후엔 의학박사가 되였고 1901년엔 온 가족을 서울로 데리고 올라왔다. 결혼초기에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편 지 한통을 받았었는데 글을 못배웠으므로 무슨 뜻인지 알아볼수 가 없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고모들에게서 조선어의 자음 모음 부터 이악스레 배워서 글을 익힌후에야 홀로 편지의 사연을 뜯어보았다고 한다. 조모와 어머니는 이렇듯 강의한 의지의 녀성 이였기에 후날 김필순을 따라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처녀지 를 개간하는듯한 무서운 정열로 억세게 살아갈수 있었던것이였 다.
아버지 김필순은 철저한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였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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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은 1905년 11월 18일 조선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 하여 을사조 약을 체결하였고 1907년에는 조선군대를 해산시키고 1910년 8월 29일에는 한일합방을 공식적 으로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망국의 치욕은 엄연한 현실 로 되였으며 이에 조선반도는 분노로 들끓었 다. 어떤이들은 민족정기의 결연한 모습을 순국으로 보여 주었고 또 어떤 이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일본에 항거하였 다. 일찍부터 민족의식에 눈을 떴던 김필순은 쓰러져가는 나라 를 부둥켜세우려고 애타게 고심하던 가운데 <105인사건 )에 깊이 련루되였다. 1910년 안명근( 安明根) 렬사의 총독암살미수사건이 있자 1912년 데라우찌 ( 寺内,   제1대 조선총독임. ) 총독암살음모라 는 구실로 일제는 신민회(新民会)  에 타격을 가하려고 우리의 저 명인사 6백여명을 무조건 검거하여 그가운데서 대표적인 인물 105명을 기소하여 공범자를 색출하기에 혈안이 되였던 사건이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105인사건 >으로서 김필순은 이 사건의 중심인물로 되여있었다. 신민회의 류동열(柳东悦),윤지호(尹致昊) 량기탁(梁起铎).라송훈,(李承熏), 리동휘(李东辉), 최광옥(崔光玉),  로백린(卢伯麟), 길선주(吉善宙) 등이 김필순의 집에서 모의했던것이다. 사건직후 김필순은 신의주(新义州)에 있는 세브란스분원에 출장간다는 말을 남기고 서울을 탈출하여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西间岛 ) 통화현(通化县) 으로 가서 병원 을 개업하였다. 당시 그는 세브란스병원 외과 과장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교감직을 겸임하고있었다. 그때 김필례고모는 한 국의 최초의 관비처녀 류학생 으로서 동경녀자학원에서 공부하고있 었는데 그에게로 인편에 보낸 김필순의 비밀편지에서는 이렇게 쓰고있었다. <필례동생 보아라,..나는 국내의 일로 일경에 쫓기 는 몸이 되여 이곳 서간도로 왔다. 이곳에서 난 새 인생을 개척 할 생각이다. 난 이곳에서 내가 지금까지 꿈꾸어오던 리상촌을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우리 나라 독립의 기틀을 닦고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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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필례야..,  넌 이곳으로 와서 그동안 배운 지식을 가지고 교 육을 말아주어야겠다.•편지 전해준분을 따라 귀국하여 가족들 을 데리고 서둘러 서간도로 오기 바란다 ..이만 총총> 필례는 즉시 귀국하여 짐을 꾸렸다. 언니 김순애와 어머니와 필순의 안해 그리고 필순의 네 아들을 서간도로 보내였다. 그자신은 필순 이가 치치할로 옮겨간후에 1916년과 1918년에 치치할을 다녀왔다.
통화에서 김필순은 조국광복의 반일단체를 조직하였다. (김 로는 열몇살때 아버지가 손수 만든 경대뒤면에서 그리고 집에서 오래 사용해온 커다란 매돌사이에서 조직이름과 태극기에 회원명 단을 짜인한것과 일부 비밀자료같은것을 분명히 본적이 있으나 나이가 어렸던탓으로 기억하지 못하였다고 회억하고있다). 그러 나 당시 봉건할거의 중국은 곳곳이 일본령사관의 세력범위였으므 로 항일활동은 매우 간거하였고 생활처지도 어려웠다. 얼마 지 나지 않아 반역자의 밀고로 조국광복의 반일단체는 파괴를 받았 고 아버지는 일본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가족들을 거느리고 흑통 강성 치치할시로 자취를 감추었다. 일본특무의 주의를 따돌리기 위하여 온 집식구는 중국옷을 입고 중국시민들속에 섞이여 중국 인습속대로 생활하였다. 김로의 언니 위나와 다섯째오빠 덕홍은 바로 이런 방랑의 생활속에서 태여났다. 아버지는 그 고명한 의 술로 하여 치치할 시관병원의 외과의사로 초빙받았으며 집에다 또 개인진료소를 하나 꾸리였다. 그리고 치치할근동에 땅을 샀 는데 로씨야에서 농기구를 도입하고 형편이 어려운 조선빈민 30 세대를 집단이주시켜 이곳에서 농사를 짓도록 했다. 김필순은 이곳에다. 리상촌을 세우고 중국일대에 흘어져있는 애국청년을 이 곳으로 규합시켜 새롭게 반일단체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로 하였다. 병원을 경영하여 얻은 수입은 모두 조국광복의 반일 단체를 조직하는데 섰다. 아버지는 특별히 목공일을 즐기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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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가운데서도 틈을 내여 바이올린과 피리 둥 악기 들 을 만들 어 흥겨운 민요가락을 연주하였으며 손수 수놓이를 하기도 하였 다. 암담한 환경이였지만 대장부의 뜨거운 정열은 강철도 녹일 듯한 힘을 과시하였다.
김로가 세상에 태여난지 두달만인 만국 9년(1920년)에 아버지 김필순은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였다. 콜레라에 걸려 세상떴 다고 전해졌으나(치치할에 콜레라가 류행한 해는 1918년이였 다.) 그 진상을 알고있기는 조모와 어머니와 김로 셋이였다. 7 형제중 막냉이로 자라난 김로는 어머니와 같이 있은 시간이 가 장오래였다. 태여난지 두달만에 "아버지를 여의여 아버지 사랑 을 모르고 자란 막내딸에게 어머니는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
김 로가 1940년 언니 위나를 찾아 항일구국혁명에 뛰여들려고 할 때 어머니는 딸의 행동을 치하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장하다, 내 딸아, 이 에미 몫까지 해서 원쑤를 갚아다오.>. 어머니의 마 음에 서리서리 엉킨 원한을 김로는 그때에야 알게 되였다. 아버지의 죽음은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그날도 아버지는 시 관병원에 출근하여 연거퍼 몇몇 환자들을 수술하였는데 한 환자 의 수술이 거의 끝나갈무렵 갑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가 간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집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말도 번지지 못하였다. 조모와 어머니는 뜻밖의 일에 어쩔줄 몰라 하며 시관병원에 갓 들어온 일본인내과의사를 불러왔다. 비록 일본인이긴 하지만 의학도덕엔 국경이 없는 법이라고 생각한 터 였다. 일본의사는 진찰해보더니 온습포(热罨)를 하라하고는 돌 아갔다. 조모와 어머니는 헤텀비면서 의사말대로 아버지에게 열 심히 찜질을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두눈을 부룹 뜨고 오른손 새끼손가락으로 강잉히 무슨 뜻인가를 손시늄하다가 숨을 거두고말았다. (아마 너무 뜨거우니 찜질하지 말아달라는 뜻이라고 어머니는 집작하였다.) 립종시 아버지의 배는 피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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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멓게 썩어나며 물러졌다. 그때 아버지를 부축해온 간호원 이 옆에서 애타게 가슴을 취여뜸으며 눈물을 그칠새없이 홀렸 다. 열몇살에 난 간호원은 김필순이 어릴 때 데려다 친딸처럼 돌보면서 의학지식을 배워준 조선족고아였다. 의사선생이 원래는 아무 일 없이 정진상태가 좋았었는데 자기때문에 그렇게 되였노 라고 간호원은 흐느끼며 말을 있지 못하였다. 수술이 끝나갈무 렵 일본내과의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간호원 보고 김의사에게 드리 라고 하면서 따끈따끈한 우유 한고뿌를 건네주었는데 내과의사에 대한 평시인상이 봄바람처럼 싹짝하고 남을 관심해줄줄 안다고 느껴졌던 간호원은 그저 감사하게만 생각되여 그 우유를 김필순 에게 드렸던것이며 마침 김필순도 수술도중 피곤하고 컬컬한 김 에 한고뿌 우유를 단숨에 마시고 조금후에는 팔다리를 못쓰게 되였다는것이였다. 간호원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눈물 흐르던 눈에 불찌가 일고 치가 떨렸다. 어머니는 그 즉지 일본의사를 찾았지만 놈은 벌써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어머니와 조모는 불현듯 속으로 짚이는바가 있었다. 이 이전에 김필순이 통화에 서 조직하였던 반일단체의 회원 한사람이 감숙을 에돌아 찾아온 일이 있었다. 반일단체가 파괴당한후 그 사람은 감옥에 같히였 는데 몸에 결핵병이 더는 호전될 가망이 없었으므로 석방받았 다. 의지가지없는 그 회원은 김필순의 집에 찾아든후 며칠 넘기 지 못하고 죽고말았는데 오늘이 바로 그 회원이 죽은지가 10일 째 되는 날이였던것이다. 이렇게 놈들은 긴 줄을 늘여 큰 고기 를 낚는 수법으로 "필군을 찾아낸후 내과의사로 가장한 일본특 무를 파견하여 마수를 뻔쳤던것이였다. 그때 김필순은 겨우 41 세였다. 마음에 품은 큰 뜻을 펴지 못하였으므로 아버지는 죽으 면서도 두눈을 감지 못하였다. 그때 김로의 오빠들은 17, 15세 였는데 혈기왕성한 애들이 경거망동하여 더욱 큰 재난을 가져올 가봐 조모와 어머니는  이일을 극비밀에 붙이고 아버지가 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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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에 걸려 급사하게 되였다고 소문내였다. 나라 잃은 설음과 남 편 잃은 원한을 어머니는 마음속깊이에 묻어 두고 일곱아이들을 거느리고 고난의 구렁텅 이속에서 헤매였다. 몇십년래 일본특무의 사악한 모습은 한시도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사라진적이 없었다. 1938년 일본경찰은 김로의 집에 갑자기 들이닥쳐 집안곽을 살살 이 수색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감시가 줄곧 그의 집을 노리고있 었음을 또 한차례 중명하였다. ◦한생을 항일투쟁에 전력하였던 아버지는 세상뜰 때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못하였다. 고모와 친우들이 치치할교외의 낡은 집을 구하여 들게 하였는데 앞뒤울안을 합치면 100평방메터가 되였다. 어머니는 거기서 돼지를 기르고 채소를 심었다. 다년간 집에서 남편을 도와 병원일을 해오는 과정에 어머니는 적지 않 은 의술을 배워냈는데 후에는 차차 용한 산파로 원근에 널리 알 려지게 되였다. 어머니가 받아낸 아기는 하나도 죽은 례가 없었 다. 수고비는 종래로 얼마를 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집 형편이 어려운 산모에게는 수고비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어머니가 돈을 꾸어서라도 좁쌀과 사탕가루와 과일같은것을 사서 주었다. 한번은 부자집의 난산환자를 받아들여 사흘밤을 지새우며 고생한 끝에 마침내 귀동자를 보게 되였는데 그 집에서는 로동의 보수 로 겨우 20전을 내놓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끝까지 따뜻하게 책 임지어주었다. 일제는 중국의 동북을 침략한후 중국의 조전인을 일본의 제6등민족으로 주민등록을 하도록 조선사람들을 강박하였 다. 망국노의 치욕을 참을길이 없었던 어머니는 죽음을 맹세코 이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치치할서문파출소의 소장은 어 머니에 대한 료해가 깊어짐에 따라 어머니의 강한 의지에 감동 된나머지 선뜻이 나서서 방조해주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끝까지 일본적에 등록하지 않을수 있었다. 소장 부인이 네 아들을 해산 할 때에도 모두 어머니가 보살렸던터였다. 김로의 동년지절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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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김로는 어머니가 잠자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저녁에 그가 피 곧에 몰려 잠잘 때까지도 어머니는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 을 하고 있었으며 어뜩새벽에 김로가 눈을 뜰 때 보면 어머니는 한창 바에 일하고 있는 중이였다. 조선전쟁이 폭발했을 때 어머니는 큰딸 위나와 함께 평양에 있었다. 그때 위나와 중국에 있던 위나의 전우들은 년로한 어머 니를 중국으로 모셔가려고 애썼으나 어머니는 끝내 듣지 않았 다. 중국에서도 지원군을 파견하여 전쟁에서 피흘리고있는데 내 가 조선사람으로서 왜 내 나라를 떠나야 한단 말이냐, 이것이 어머니의 간단한 리유였다. 후에 어머니는 방공호에서 위나의 수 양딸과 함께 밥을 짓다가 불행하게도 비행기 폭격을 받았다. 수양딸은 당장에서 죽고 어머니는 중상을 입고 병원에 호송되였 다. 림종전 진찰해보니 놀라웁게도 간암후기였다.
아버지 김필순은 어머니 정씨와의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는 데 위나가 여섯째이고 김로가 일곱째였다. 큰오빠는 김덕봉 (金德凤), 일명 김영 (金煐) 이다. 어머니와 고모들은 그를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의학을 전공시키기로 하여 아버지가 생전에 쓰던 의료기구들을 하나하나 팔면서까지 그를 산둥 제로대학(齐鲁大学) 에 보내여 9년간 공부하게 하였다. 줄 업후 덕봉은 단둥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원장이 되였다. 인물이 남달리 영준하고 체육에서 이름이 높았던 그는 결혼 후 4남1녀 의 자식을 두었으며, 뜻밖의 사고로 1937년 1 월에 35새를 일기 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둘째는 김덕호 金德虎), 일명 김의(金燱)이다. 아버지가 새상뜬후 그는 사처로 떠돌아다니면서 학도공으로 일하였다.. 아버지의 재주를 물려받은 그는 수놓이를 즐기고 바이올린을 아주 잘 만들었으며 고생스레 자습하여 의사로 되였다.. 그는 4남2녀의 자식을 두었으며 1982년에 미국에서 세상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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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가 김덕린(金德麟), 일명 김염(金焰)이며 넷째는 김덕상( 金德象)일명 김강(金刚)이다. 아버지가 세상뜬후인 1923 년에 조모는 두 오빠를 당시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고있던 김구례, 김순애고모에게로 데려가 키웠다. 셋째오빠 김염은 후 날 30년대 중국영화계의 <영화황제>로 불리우는 인물이 되였으 며 1983년 북경에서 세상떴다.
다섯째인 김덕홍(金德鸿), 일명 김소어(金绍鱼)는 김로의 바로 우 오빠로서 어린시절 김로를 매우 끔찍이 사랑해주었다. 중학시절때부터 위나언니와 다섯째 오빠의 강렬한 항일사상은 김로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덕홍은 고중졸업후 항일대오를 찾아 다니던중 천진 하북일대에서 국민당19로군에 참군하여 서기 (文书)로 있었다. 후에 19로군이 해산된후 그는 간난신고를 격 으며 상해의 고모들께로 찾아갔다가 거기서 죽었다.

항일조직을 찾아서

김로의 원명은  김효봉(金孝奉) 이고 연안에 있을 때엔 연군 (燕军)이라 불리웠다. |그는 1920년 7월 1일 흑룡강성 치치할시 에서 태여났다. 효봉이란 이름은 아버지가 세상뜬후 고모들이 지어준것으로 효성스레 끝까지 어머니를 모시라는 뜻이였다. 위 나는 김로보다 세살이상이였다. 그의 본명은 김우명(金右铭) 또는  김위(金炜)였다. <위나>는 연안시기 이름으로서 전우들은 그 의 이 이름을 즐겨 불렀다. 아버지가 세상뜰 때 위나는 세살이 였고, 두 자매는 똑같이 아버지 얼굴을 기억할수가  없었다. 그 네들이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뼈저리게 느낀것은 생활의 어려 움, 그리고 남들에게서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였다는 아픔이였다. 매일매일 눈에 안겨오는것은 온 집 식구의 생계때문에 바빠 돌아치는 어머니의 로동의 모습이였고 차차 체온으로 느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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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깊이 새겨진것은 강렬한 정의감과 반일정서 그리고 조국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이였다.
< 김로가 일급살이 되여 흑룡강녀자사범부속소학교에 입학했 을 때였다. 첫 며칠 코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갔더니 애들이 놀 려주었다. 천신을 살 돈이 없었으므로 어머니는 쓰레기에서 남 들이 버린 신을 주어다 알뜰히 기워서 김로가 신게 하였다. 그 러나 김로의 기쁨은 얼마 가지 못했다. 퐁퐁 뛰며 학교갈 때와 는 달리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실망하고 타격받고 소침해진 모 습을 하고 돌아왔다. 뜻밖에도 집근처의 애들이 그 신을 알아보 고 김로를 따라다니면서까지 놀려댔던것이다.
김로는 매일 하학 후이면 거름을 줏고 나무와 석탄 찌꺼기를 주으러 다녔는데 손발 이 얼고 터져서 말이 아니였다. 이를 본 반간부들은 일부러 위 생검사를 한다면서 그에게 불합격을 매겨놓고는 그 벌로써 유리 를 닦는 일을 시켰다. 평시에 유리가 깨여진 일이 생겨도 무조 건 그가 깼다고 무함하였다. 그는 어린 마음에도 너무 분하고 억울하여 어떤 땐 당장이라도 죽고만 싶었다. 어머니는 자애롭 게 그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뒤아주면서 당금 식량을 사 야 할 돈을 떼내주어 배상하게 하였다. 김로에게 이런 일들이 여러번 발생하자 학교의 붕(棚)선생님이란 분이 김로를 불러 그 때 돈으로 홍탕 한근을 살만한 돈을 주면서 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 홍탕으로 손을 문지르고 불에 구우라고 방법을 대주었다. 어머니는 그 돈으로 홍탕 두낭만 사고 나머지로는 쌀을 샀다.
그가 소학을 졸업할무렵인 1931년에 <9. 18>사변이 일어났으 므로 졸업식이 겨울로 미루어졌다. 이 이전 만보산(万宝山)사건 이 일어났을 때 치치할에선 조선인때문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 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자 한반의 동학들은 김로를 벽구 석에 가두어놓고 격분에 차서 욕하고 떼리였다. 주먹질과 발길 에 멍이 들고 피가 솟았지만 쓰린 마음에 비기면 아무것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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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그는 생각되였다. 친구들도 애국심에서 나왔겠지만 발디딜 곳이 없는 어린 망국노의 상처입은 마음을 그들이 어찌 알았으 라. 아물줄 모르는 상처에 소금을 치는듯 쓰라렸던 그때의 심정 을 김로는 영원히 잊을수 없었다. <9.18>사변후 치치할은 그야 말로 공포의 도가니였다. 날마다 일본비행기가 낮추 지붕우를 날아다녔고 어느 한곳에서도 노예적생활을 강요당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녀자애들은 열서너살쯤 되면 애티나는 얼굴임에도 머리 를 쪽져 새아씨차립을 하여야 요행 봉변을 면할수 있었다. 학교 에서도 차츰차츰 일본인선생들이 교편을 잡았다. 1933년 봄에 김로는 녀자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초중공부를 하였다. 그때 위나언니와 다섯째오빠는 고중에 있었다. 언니와 오빠들은 같이 모이기만하면 가슴그득히 차오르는 비분과 망국의 설음을 통탄하였다. 위나는 일기책에 이렇게 썼다. <조선과 중 국에서, 두번 다시 망국노가 돼야 하는 이내 신세, 참아낼길 바 이 없구나...> 그는 학생들의 항일조직에 참가하여 청년들사이에 널리 활약하면서 학생들을 항일투쟁에 뛰여들도록 선전하였다. 일본의 세력이 문교위생계통에까지 침투되였던 당시 위나의 활동 은 일본특무들의 주의를 일으켰으므로 학교당국에서는 위협을 느 끼고 위나를 학교에서 제명해버리였다. 위나는 퇴학당하자 상해에 있는 셋째오빠 김염을 찾는 한편 내지에서 활동하고있는 조선혁명자를 찾아떠났는데 이때로부터 그의 간거한 투쟁의 생활이 시작되였다. 그는 상해, 남경, 서주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적지 않은 열혈청년들을 만나 투쟁의 앞길 을 탐구하였다. 상해좌익문예운동의 지도자의 한사람인 전한(田 汉)이 제포되였을 때였다. 위나는 오빠 김염과 영화연극계의 진 보인사들을 협조하여 국민당내의 진보인사들과 교섭하면서 전한 율 구원하고저 헌신적으로 활약하였다. 1933년부터 1937년의 (7.7)사변까지 위나는 관내에서 류랑생활의 쓰거움을 맛볼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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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보았으나 그런 속에서도 항일구국의 선전활동을 완강히 견지하 였다. 그는 항상 투지가 암양되고 격정이 흘러넘쳤으며 남을 자 기처럼 사랑해주었다. 이는 당시 그와 접촉해보았던 사람들이 그에 대한 공동한 견해이며 또한 찬양이였다. < 7. 7 >자변후 남경, 상해가 일본에게 점령 당하자 위나는 무한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그와 같은 신세로 남경, 상해를 뗘 나온 문예계의 옛친구들을 만났다. 그는 만회천(万赖), 장민(章岷) 등이 조직한 항일문예단체인 항적 극사 (抗敌剧社) 에 참 가하여 무한, 계공산(鸡公山) 일대를 누비며 성세호대한 항일선 전활동을 진행하였다. 위나는 대외련락을 주로 담당 하였는데 그 자신의 비범한 재능과 깊은 수양으로 하여 당시 중국국민혁명군 제5전구의 리중인장군의 적극적인 지지와 높은 찬양을 받았다. 리종인장군은 정교한 액틀에 넣은 자기의 사진을 친히 위나에게 선물하기도 하였다. 그때의  무한은 주은래, 막말약 등 동지들의 령도와 호소하 에 제3청(第三厅)을 기지로 한 항일선전과 문예 연출이 전례없이 활약적이었다. 그러므로 항일 정서가 드높고 문예계의 통일전선은 대단결, 대합작의 국면이 이루어졌으며 국민당 완고파와의 투쟁은 매우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정세하에 중국에서 다년간 간 고하게 혁명활동을 견지해온 최창익 (崔昌益), 김학무(金学武) , 정향명 (丁向明) 등은 당의 지시하에 무한에서 항일구국의 조선 의용대를 창립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위나는 격동된 심정으로 그 즉시  계공산을 떠나 무한으로 달려와 조선의용대에 참가하였 다. 의용대의 동지들을 천군만마를 얻은듯 기뻐하며 위나에게 대외련락을 책임지웠다. 위나는 불타는 정열로 투쟁에 뛰어들어 항일 통일전선을 확고히 하고, 금방 성립된 조선의용대의 고립된 국면을 타파하고저 심혈을 쏟았다. 의용대 선전대의 문예 연출에 서도 위나는 주요 배우를 담당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성립후 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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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군판사처의 지지하에 국민당우군과의 단결사업을 잘하여 우 군의 신임을 얻고 제5전구에서 기세드높은 항일구국활동을 진행 함으로써 자기의 대오를 강화 하였다. 이 면에서 위나는 뛰여난 역할을 일으켰던것 이다.
1939년 국민당이 반공고조를 일으키자 조선의용대는 아주 위험한 처경에 처하게 되였다. 1940년초에 조선 의용대는 당의 지시하에 황하를 건너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이르러 적들에 대한 선전사업과 적구사업(敌区工作)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다. 조선 의용대대원들은 태항산의 문예종합공연에도 적극 참가 하였다.
그 들이 마대와 벼짚으로 만든 연극용쏘파는 신통히도 진짜같았다. 그들이 공연한 <황군몽(皇军梦) > 등 연극 은  사상과 예술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위나는 절목들에서 번마다 녀주인공역을 하였다. 그가 공연지에 즐겨부른 노래 < 아리랑 >은 드넓은 태항 산골짜기. 마다에 아름답게 메아리쳤으며 태항산군민들의 마음 속에 샘물과도 같은 신선한 감동을 부어넣었다. 1940년 아군은 백퇀 대전 (皇军梦)  에서 휘황한 승리를 거두 었으며, 조선의용대는 아군과 배합하여 적구에 심입 해들어가 적들을 와해시키고 항일대 오를 확대시켰다.
위나가 집을 떠나 항일투쟁에 전력하고있을 때 집에서는 오 빠도 집을 떠나고 학생으로는 김로만이 남아서 일본의 노화교육 을 받았다. 고중시절 학교의 일본인체육선생은 전형적인 노화교 육의 집행자였다.
어느 한번, 선생이 발을 헛디더 넘어졌는데 김로가 그옆을 지나면저 미처 부축하지 못하였다 하여 천둥같이 노하였으며 그후부터는 체육시간때마다 구실을 잡아 김로에게 여 러가지 벌을 안겼다. 김로의 언니오빠가 관내로 떠나갔다는 소 문이 퍼진후, 어느날 과당시간에 일본인반주임전생은 김로를 지 명해세우고 히물히물 웃었다. <집에는 누가 있어요? 언니랑 오빠랑은 어디로 가구?) 김로는 류창한 일본어로 또박또박 내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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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하였다. <뒤조사를 하시려거든 집으로 방문오시죠. 제가 어 런히 대여드리지 않을라구요. > 1938년 고중졸업때 소위 <사상이 좋은 >사람들만 일본에 갈수 있었고 <아다마 와루이(사상이 불 결합. )>라고 인정받은 김로는 태강(泰康)현소학교 교원으로 배 치받아 2년간 의무복무를 한후1940년엔 위만성정부 개척청( 开拓厅 )  공상과에서  직원으로 일하였다. 고중졸업전후 김로는 언니 로부터 여러통의 편지를 받았다. 적구사업의 수요로 위나는 하 남성 로하구(老河口), 락양 둥지를 돌았는데 1941년에는 잠시 북평에 머물러있었다.
김로는 편지를 받고 오래전부터 마음에 익혀온, 항일하려 떠나자는 결심을 군히게 되였다. 당시 큰오빠 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장춘에서 의사로 있던 둘째오빠는 직장 을 잃고 안해와 애들을 데리고 집에 와토끼를 기르고있었다. 그러므로 김로가 직장을 버리고 집을 떠난다면 집형편이 더 어 렵게 되리라는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60여자의 어머니를 두고 떠나자니 눈물이 앞을 가리워 어머니를 바로 볼수가 없었 다.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알뜰히 짐을 꾸려주었고 떠 날 준비를 해주었다. 우선 돈 30원을 구해오고, 서문파출소 소 장을 찾아 위만출국증을 떼여왔으며 낯선 고장에 가서 허둥대지 않도록 북평에 오빠가 있다는 치치할교회의 할머니 한분을 찾아 서 미리 련락해놓아 돌보아주도록 부탁하였다. 모성애와 조국애 가 뒤엉킨 어머니의 위대한 그 모습을 김로는 그후 천애지각 어 디에 가서도 잊을수 없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김로는 언니에 게 떠난다는 편지를 띄운후 동북을 떠나와 1941년 4월 5일에 북평에 도착하였다. 그들의 련락지점은 북평동성구교회였다. 그런 데 공교롭게도 위나가 그매 명령을 받고 북평을 떠나 기로남(冀鲁南)에 가  있었으므로 김로는 약속대로 언니를 만나지 못하었 다. 김로는 하는수없이 고중동창생의 남자친구의 소개로 아빠트 에 세를 내고 주숙하면서 한편으론 중국대학 국학 2핫년 방청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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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공부하였다. 기회를 기다릴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김로 는 학교에서 많은 동복고향친구들을 사귀게 되였으며 신문광고에 따라 일본어가정교사로 일하려고 애쓰던 가운데 북경도서관의 성 이 리가라는 분을 알게 되였다. 김로보다 열몇살이상인 그 사람 은 미술에 능하고 영어도 잘하였는데 김로가 그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주면서 지내보니 인품이 후덥고 믿음직했다 1941년 11월 김로는 고생스레 기다리던(그 사이 김로는 아 빠트세를 못 물어 9월부터 어머니가 부타해놓았던 치치할교회 할머니의 오빠네 집에 가 있었다. 호북태생인 그 할아버지는 사 리에 밝고 호탕한 성격이였다.) 언니의 편지를 받았다. 위나가 한단에서 보내온것이였다. 언니는 편지에서 조선의용대내부에 변 절자가 나타나 한단역에서는 변절자를 앞세우고 수색하는통에 자 기는 꼼짝할수 없는 형편이니 김로더러 찾아오라는 사연을 밝혔 다. 김로는 한단으로 찾아가 순리롭게 언니를 만났다. 그날은 흥분과 격정에 벅차던 날이였다. 언니는 그에게 백퇀대전을 비 롯한 혁명 이야기들을 생동하게 들려주었다. 언니의 말을 듣노라 니 젊은 그의 피는 혁명에 대한 동경으로 끓어번졌다. 일본침략 자를 몰아내고 내 나라 내 땅에서 떳몇이 살수 있다는 그 희망 과 기쁨은 족히 사람을 미치게 하였다. 눈앞에는 어느덧 어머니 가 늘 외워온 들꽃향기 그육한 고향길이 아련히 나타났다. 그때 언니와 함께 있던 동지들은 거의다 동북태생이였다. 언니는 김 로에게 첫 임무를 맡겼다. 즉 북평으로 돌아가 약품, 약솜, 붕 대, 종이, 필 같은것을 사오며 또한 항일대오의 새로운 힘으로 될수 있는 동창생들을 데려오라는것이였다. 김로는 언니의 파견 을 받고 북평으로 돌아왔다. 그는 평시에 친숙하게 지내던 몇몇 친구들을 찾아 혁명도리를 선전하면서 같이 하북성으로 떠나자고 약속해놓고 로비를 주었다. 그런데 그의 돈을 받은 동창들은 파 침 차비가 없던차에 그 돈을 가지고 동북고향으로 달아나버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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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김로는 화가 치밀고 안달아났지만 어쩔수 없었다. 자기를 경찰에 물어먹지 않은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였다. 경험이 없는 데다 관찰력이 부족하고 너무 급히 서풀렸던 자기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한 시간은 하루하루 다가와 이제는 더 생각할 겨를 이 없었다. 그는 북경도시만의 리선생을 찾아갔다. 태평양전쟁 폭발후 일제는 제멋대로 북평 도서관을 포위수색하였으므로 일본 의 만행에 대한 리선생의 적개심을 매우 강렬하였다. 평시에 일 어를 배워주며 그에게서 이런 반일정서를 충분히 읽을수 있었던 김로는 어지간히 신심이 있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자기는 조선사람으로서 항일하려 집을 떠났으며 지금 기회가 있으니 같 이 가지 않겠느냐고 온몸에 정의감이 북받쳐 도도하게 말하였 다. 어디서 그런 힘이 거세게 솟구치는지 그자신도 놀랐다. 그 는 언니에게지 받은 감동을 그대로 전달시켰다. 리 선생은 여직 까지 김로가 일본특무인가 의심되여 펵 조심하였다면서 반색 해하 였다. 그러나 자기는 당금 떠날수 없다며 도서관의 등박 (邓博).등장 (邓翔)형제를 소개하여 주었다. 등박은 23살이고 등장은 20 살이였다. 김로는 매우 기뻤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호북할아버 지가 김로를 문밖에 나가지 못하게 단속하였다. 당금 설인데 어디로 싸다리느냐,> 다 큰 가시나가 나쁜 무리에 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내 동생과 네 에미를 대 하겠느냐".> 아마 김로가 밤늦게 돌아오고 낯선 남자들과 련락이 있는걸 보고 부쩍 의심 이 들었던 모양이였다. 김로는 하는 수없이 할아버지에게 자기가 동북을 나오게 된 목적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할아버지는 그제 서야 혀를 끌끌 차며 납득이 되는듯 김로를 놓아주었다. 이러는 사이 또 일주일이 지체되였다. 셋은 드디어 떠날 준비를 하였 다. 김로는 약품과 약솜과 붕대, 필과 종이를 트렁크 제일 밑바 닥에 고정시켜 넣고 그우에 옷으로 누른 다음 맨 우에는 일본뗙 과 일본잡지, 그리고 날개 달린 천사모양의 인형을 넣었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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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학 학생증을 가지고있었는데 이번 걸음에 집으로 부모뵈러 가는것으로 변장이 되여 있었다. 렬차안은 경비가 매우 삼엄하였 다. 김로는 등씨 형제와 갈라져 앉았다. 등씨 형제는 북평도서 관 공작증을 가지고있었다. 김로의 맞은퀄에는 두 일본사람이 앉아있었다. < 이 가지나, 참 이상하다. 생김새며 눈길은 조선사 람인데 행동거지는 중국사람같고 말은 또 일본말을 잘하니까. ..> 하고 그들은 지회들끼리 쑥떡거렸다. 조금 지나니 열차안에 서는 하나하나 짐을 검사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트렁크를 검사할 차례가 가까와오자 김로는 너무도 긴장하여 심장이 곧 튀여 나올 것 같았다. 등씨 형제의 눈길도 은밀히 이쪽을 주시하고있 었다. 김로는 한가한척 창밖을 내다보며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 다. 철도경찰이 그의 트렁크를 열자 안에서 일본 떡과 천자모양 의 인형과 일본잡지가 드러났다. 그것을 본 두 일본인이 < 허이 참, 아직도 어린애야 > 하면서 제나름대로 감탄하였다. 그 말을 들으며 철도경찰은 더 뒤지지 않고 트렁크를 닫아 버렸다. 저녁 이 되었을 때 렬차는 한단역에 서서히 멈춰섰다. 김로는 한시름 놓이긴 하였으나. 언니와 약속했던 시간도 지나고 적의 소탕도 시작되였으므로 언니와 런락지을 일이 몹시 걱정되였다. 아니나 다를가 그들이 비밀련락처인 방촌 (旁村)의 약방으로 찾아 갔더니 런락이 되지 않고있었다. 김로는 속이 덜 컹하였다. 혼자도 아닌 데, 언니와 조직을 못찾게 되면 어떻게 하랴 싶었다. 밤이 다 되였으므로 그들은 우선 자그마한 려관에 주숙해들었다. 등씨형 제는 큰방에 들고 그는 작은 방에 들었다. 그는 침대에 두껍게. 쌓인 먼지를 대강 쓸고 옷을 입은채로 자리에 누웠다. 이렇게 있다가 날이 새면 어떻게 하든 언니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서 정신을 바짝 차리였다. 밤에 놈들이 야간순찰을 나올지 모르 니 경각정을 높여야 한다고 등씨 형제에게 특별히 주의주었으나. 너무 피곤했던 그는 그만 자기부터 깊이 자버렸다. 이튿날,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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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간단히 토론을 거쳐 등상은 남아서 짐을 지키고 김로와 등박 은 부부로 가장하고 조직을 찾아 떠나기로 하였다. 먼저 런락지 점에 다시 가보니 역시 아무런 동정이 안보였다. 김로는 하는 수 없이 기억을 더듬어 이전에 언니를 만났던 집을 찾아갈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냉이로 자라난 그는 어릴 때부터 한번 갔던 길을 기억해두는 눈찔미가 없었다. 집들도 비슷하고 골목길도 똑같아보일뿐 아무리 훑어도 마당에 김치단지를 가득 널어놓은 그 간장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서럽고 애가 말라 울상이 된 모 습으로 온 낮을 헤매서야 기억속의 모양과 비슷한 집이 눈앞에 나타났다. 김치, 간장 단지가 가득 널려 있는 마당에 한 할아버 지가 서성대고있었다. 김로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다가가 말을 건네였다. 바로 이때 집안으로부터 환성을 올리며 두팔을 쩍 벌 리고 포용할듯이 달려나오는 이가 있었다. 언니였다! 며칠째 위 나는 소금가마속에 쪼크리고 숨어서 바질바질 속을 태우며 김로 네를 기다렸던 것이였다. 김로는 너무 반가와 언니의 품에 쓰러 지며 어린애처럼 엉엉 울어버렸다. 등막이 옆에서 언니를 보며 웃었다. < 난 또 얼마나 노련한 혁명자였다고, 일찍 알았다면 감 히 따라오지 못했을걸.> , 김로는 드디어 언니의 소개로 김창만. (金昌满), 리명선(李明善) 등 조선의용대 지도 동지들을 만날수 있게 되였으며, 이로써 항일 투쟁에 뛰어들려는 그의 오랜 숙망, 이 현실로 되여 힘있게 첫발자욱을 내디디였다. 며칠후 그들은 팔로군총부를 바라고 하루밤에 120리속도로 행군을 시작하였다. 김로가 북평에서 새로 사 신었던 천신은 인 나를 찾느라고 돌아다니다보니 신바닥이 다 드러났다. 구두는 딴딴해서 걷기가 어려웠다. 한단에서 새벽에 출발하여 산 하나 를 넘어서니 발바닥이 아파서 더 길을 수가 없었다. 산서경내의 녀차들은 모두 쪽발이여서 그는 별 수없이 쪽배만큼한 남자신을 구해서 딴딴한 바닥을 돌에다 두드려 약간이나마 부드럽게 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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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끈을 조여서 신었다. 그들은 기세 사나운 일본소탕대오의 뒤를 따라다니며 숨바꼭질을 하였다. 한달간의 간고한 행군끝에 2월 말의 어느날 그들은 마전 ( 麻田) 에 주둔해 있는 팔로군총부에 이 르렀다. 그날은 일본소탕군이 소당을 끝내고 붕쇄선을 넘어선 바로 그 이튿날이였다. 마을밖에는 소선대원들이 망을 보고 있었고 총부 앞까지 가니 두루마기를 입을 두 남자가 지켜서 있었다. 적들의 (삼광)정책에 아군은 청야전술 ( 坚壁清野)을 써서 물건은 동굴에 감추고 사람은 산굴에 숨었다. 음력 설이였으므로 부근의 백성들은 동굴속에 숨겨두었던 만두를 꺼내여 그들보고 먹으라고 권하였다. 그곳 사람들은 원래 음력 설후 초엿새 전에는 절대 굴을 열고 먹을것을 꺼내지 않았다. 그 풍속을 알고있는 동지들은 절대 먹을수 없다고 고집하였다. 그러자 농민은 순박 하게 웃었다.《괜찮수다, 하느님도 우리를 원망하진 않을거유.》 라서 경동지는 김로 자매가 어리다고 여겨 적에게서 로획한 하나밖 에 없는 좋은 이불을 특별히 그들에게 덮으라고 주었다. 언니와 같이 포근히 이불을 덮는 순간, 김로는 처음으로 사람취급을 받 는다는 느낌이 들어 온몸이 후더워나고 행복하였다. 그리운 어머니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 랐다...  혁명의 성지 - 연안으로
1942년 1월 부터 5월 사이 일본군은 갑자기 태항산에 주둔하 고있는 팔로군전방총부를 맹렬히 습격하였다. 《5월 대 소탕》때 김로 자매와 백명도 안되는 조선의용대는 포위돌파의 간거한 임무 를 맡아 나섰다. 전투는 매우 치렬하였다. 대원들은 일당백의 영용한 기백으로 팔로군총부가 포위를 뚫고 나가도록 보위하여 싸웠다. 전투에서 조선동지들이 많이 희생되였다. 추도식에서 주덕, 라서경 등 동지들은 대장부의 눈물을 휘뿌렸다. 조선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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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성스런 사명을 짊어진 몸으로서 중국혁명을 위하여 그토록 영용히 싸우고 아낌없이 몸바치는 정신이 너무 보기하다고, 주 덕동지는 찬탄해마지 않았다. 그해 5월 , 당에서는 혁명골간을 보 호하고 조선혁명을 위한 간부들을 배양하기 위하여 의용대 동지들 을 연안으로 보내였다. 위나는 다른 임무가 있어 같이 떠나지 못하고 두 자매는 태항산에서 뒤날을 기약하며 작별하였다. 그 때 연안으로 향한 대오는 조선의용대 동지들과 일본포로병까지 합 하여 백여명이 되였다. 대오는 밤낮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그들 이 산서의 동표로 (同蒲路) 모습에 이르렀을 때 공교롭게도 대원 (太原)에서 나은 일본순라차와 맞부딪치게 되였다. 정보를 받은 일 본군은 즉시에 일곱대의 자동차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오솔길로 달리고 적의 자동차는 큰길로 포위를 늘이며 쏜살같이 추격해왔 다. 정황은 매우 위급하였다. 오후 세시부터 추격받기 시작하여 산서서북까지 180리를 달리니 밤이였다. 말들은 입에 거품을 물 고 쓰러져 사람을 태우지 못하였고 사람들은 기진맥진하여 한발 자욱도 내디디기 어려웠다. 오솔길과 큰길의 교차점을 아슬하게 지나 허위허위 올리막산길에 들어서는데 적들의 차가 쫓아왔다. 아무렴 이렇게 끝난단 말인가, 그들이 긴장하고 고통스럽게 한숨 지을 때 불현듯 산우로부터 환성이 터졌다. 보니 련락을 받고 달려온 아군 120사의 동지들이 산우의 유리한 지세를 차지하고 6대의 기관총으로 적들을 묘준하고 있었다. 기세 사납던 적들은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눈을 편히 뜬채 그들이 안전한 게 산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볼수밖에 없었다. 잇달아 적들의 발 광적인 산수색이 시작되었으므로 그들은 또 엿새를 추격당하였 다. 도중에 천주교교회당에 잠간 머물러 휴식하였는데 김로는 급성륵막염 (肋膜炎) 으로 자리에 쓰리진채 일어날수가 없었다. 120 사의 한 둥지가 개릏 잡아 개간을 남것으로 먹으면 된다고 밀방을 알려주었다.
김로와 리달(李达) (일명 양해춘 (杨解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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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리달은 후에 김로의 형부가 되였다.)은 그 말대로 생 개간 을 먹고 신기하게 힘을 입어 이름날 40리 산길을 걸었다. 한달 간의 간고한 행군끝에 6월에 그들은 마침내 혁명의 성지-연안 에 이르렀다. 펑시에 그토록 자석처럼 끌리던 마음의 고향 연안 에 발을 들여놓을 때 김로는 더없이 격동되였다. 그의 어깨에는 북평에서 준비해간 약보따리가 그대로 메여져있었다. 김로는 급성륵막염으로 화평병원( 和平医院 )에 입월하였는데 병원에서 22살의 생일을 맞았다. 그해 가을에 연안은 산사태가 덮쳐 크게 파괴받았으며 그바람에 많은 동지들이 병으로 몸져누 웠다. 이에 김로의 약은 크게 은을 내였다. 김로는 일부분 약을 연안병원에 남기고 대부분은 전방으로 보내였다. 얼마후 김로는 화평병원에서 학생료양원으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성세호대한 정풍운동에 참가하였다. 운동에서 김로는 천만뜻밖에도 특무로 혐의받았다. ~김로는 어안이 벙병해졌다. 무엇을 어떻게 말했으 면 좋을지 몰랐다. 변호할수록 더욱 의심스러워졌고, 그렇다고 입을 꾹 다물고있으면 그것 또한 이상하였다. 치치할에서 어머 니와 리별하고 금방 연안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혁명에 참가하 기도전에 난데없이 특무라고 하니 참으로 억이 막힌 일이였다. 그때 언니 위나는 7월달에 연안에 왔다가 또 인츰 떠나갔으므로 그의 무고합을 증명해줄 사람이 없었다. 혼자 몸으로 동북을 뒤 쳐나왔고 그와 혁명의 길로 함께 떠난 두사람도 북평에서 만난 사정이니 유력하게 증명이 될만한것은 하나도 없었다. <특무험 의범>이라고 심문받을 때는 어처구니없는 질문도 제기될 때가 있었다. <통행중은 누가 떼여주었습니까?> <기차를 타고 올 때 몇사람이 함께 왔댔습니까?>  조선의용대는 연안에 도착한후 연안조선군정간부학교라고 그 이름을 고치고 체계적으로 혁명리론을 하습하였다. 위나는 연안로신예술학교 제5기희극음악학부( 戏音系 )에서 학습하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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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김로는 1942년 11월에 섭감녕 변구정부 연구실 에 배치받아 사업하면서 한편으로 정치문화학습을 견지하였다. 이듬해에 김로 는 연안대학행정학원 교육학부에서 일년 학습을. 거친후 1944년 하반년에는 연안조선군정간부학교의 문화교원으로 일하였다. 그 때까지도 <특무협의 >라는 검은 딱지는 보이지 않는 마귀처럼 줄 곧 그의 뒤를 따랐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련합국에 무조건 항복함 으로써  피비린내나는 전쟁의 막을 내렸다. 하늘땅을 진감하는 이 승리의 희소식과 함께 위나는 조선군 정 간부학교를 따라 조선 평양으로 가서 조선건설의 성스러운 투쟁에 뛰여들었다.
조선에서 그는 조선로동당 선전부 부장 부녀부장으로 사업하였다. 1945년 9월 27일 김로는 복잡한 심정으로 결혼하였다. 일제의 멸망은 그를 열광적인 기쁨에 잠기게 하였으나 (특무혐의)의 루명으로 인한 마음속의 안개는 갈수록 짙어갈뿐이였다. 남편 소위(肖炜)는 로 신예술학교 제5기희극음악학부의 졸업생으로서 언니 위나와 동창 이였다. 김로는 생각다못해 남편에게 루명을 벗기전에는 동거할 수 없다고 자기의 뜻을 강경히 피력하였다. 결혼후 남편은 동북 으로 떠났고 그는 연안에 혼자 남아 서북국(西北局 ).당시의 조 직부형식임. )에서 사람이 오기를 인내성있게 기다려 끌내는 <특 무험의가 없음. >이라는 증명을 받아내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 서 새생명을 얻은듯한 이 기쁨과 새생활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 을 편지에 적어서 남편에게 띄웠다.
1946년 2월 김로는 조선군정간부학교의 나머지 인원들을 따 라서 연안을 떠나 조선으로 갔다. 도중에 장가구를 지날 때 <흑 차산(黑查山)사건>에 직면하게 되였다. 등발,(邓发) 엽정( 叶.  挺) , 박고 (博古 )등  5명의장군들이 불행하게도 이 사건에 희생 되였다. 김로와 의용대동지들은 한없이 비통한 심정으로 밤도와 알심들여 만든 화환을 안고 추도회에 참석하였다. 김로는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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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언니 위나와 함께 한달 있다가 중국 동북으로 돌아와 치치 할서교일보 신눈강보에서 편집 겸 기자로 사업하였다. 1948년 2 월 김로는 오래동안 갈망해오던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동북 군구정치부. 제4야전군정치부 후근보편집, 기자 부주편으로 사업 하였다. 1951년 김로는 남해합대 정치부에서 자료실 비서로 일 하였으며 1954년초에는 황포해군 선박 수리제작공장의 당위선전 부장을 임하였다. 1956년 7월 김로부부가 북경으로 조동할 때 김 로는 중앙문화부 영화국(电影局)당위사무실 선전간사였고 남편 은 해군정치부 문화부 부부장으로 있었다.

후 기

1945년 항일전쟁승리후 조선의로 가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 화국 조선로동당 선전부 부장 부녀부장으로 있던 위나는 후에 외문출판사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1958년에 위나는 조선의 저명 한 작가 한설야의 소설들을 번역하여 중국 북경으로 부쳐왔다. 편집부문에서는 그의 번역수준을 높이 평가하여 즉시 출판하려 하였으나 당시 조선과 중국에서 " 한설야를 진일보 연구비판해야 한다고 인정하였으므로 출판되지 못하였다. 그해에 위나는 한설 야소설의 뒤부분의 번역본을 부쳐오면서 김로에게는 마지막이 되 는 편지를 동봉해왔다. 편지에서 위나는 중국의 로전우들이 그 립 고 그를 낳아길러준 중국땅이 한없이 그리움다고 토로하면서 건강상태가 좋지 못하니 중국에 와서 병치료할 생각이 간절하다 고 말하였다. 김로는 언니의 편지를 본후 언니가 더욱더 사무치 게 구리워져 하루빨리 언니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위나는 중국의 친우와 동창들에게 무한한 그 리움과 기대를 남긴채 끝내 오지 못하였다. . 민족해방운동에 성 스러이  한몸을 .담그고 일생을 불태운 위나는 불규칙적인 생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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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 나빠졌고 자궁수술 , 위수술을 받는바람에 슬하에 자식 하나 두지 못하였다. 수양딸을 기를 때 위나 부부는 딸에게 줄 장난감, 머리꽂개, 책가방,웃 같은것을◦멀리 중국의 김로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보내오도록 하였었다. 헌데 미군의 폭격에 그 가날픈 즐거움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질줄이야. 위나의 드팀없는 민족적 지조와 뛰여난 재질은 그의 아름다운 랑만의 모습과 함께 전우와 동창들의 추억속에 채색의 꿈이런듯 오래오래 남아있었 다.◦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진 별찌, 그는 본래 하늘공중에 유난 히도 반짝이던 어엿한 새별이였다!
문화대혁명 이 폭발하자 김로의 남편 소위는 현행반혁명집단 의 두목으로 인정 받고 투옥되였다. 잇달아 김로도 현행반혁명집 단의 성원으로 감투를|쓰고 셋째와 넷째 두|딸을 테리고 호북성 함녕(咸宁)의 문화부 5. 7간부학교에 가서 로동개조를 받았다. 둘은 같은 곳에서 개조를 받았지만 줄곧 만날수 없었다. 김로는 거기서 돼지를 |먹이고 공공변소의 거름을 퍼내고 채소발을 가꾸 고 식당밥을 짓는 등 일들을 하였는데 겨울높의 얼음을 파내는 일은| 그의 건강을 몹사 파괴하였다. 한번씩 무릎을 걷고 뼈속까 지 얼어도는 얼음물속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피부색이 퍼렇게 변해있었다. 지나친 로동으로 귀에선 소리가 났고 몸은 어느 한 곳도 성한데가 없었다. 동란이 결속된후 그는 지팽이를 짚지 않 고서는 한발자욱도 내디디기 어려웠는데 완강히 신체단련을 견지 하였으므로 5년만에 지팽이를 버릴수 있었다.
남편은 해군감옥에 감히여 비인간적인 박대를 받았다. 반란 파들은 그를 발로 차고 때리고 목을 조이고 하면서 물을 못먹게 하였다. 1972년 남편의 후두염은 수술받지 않으면 안되였으므로 잠시 북경으로 수출하러 오게 되였다. 때는 림표집단이 이미 꺼 꾸러진 뒤였으나 여전히 총을 든 전사가 그를 압송해왔으며 그 들 부부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 무엇도 김로의 비분의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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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돌려세울수 없었다. 현행반혁명이 된지도 아득히 백년전의 일같았다: 그는 모든것을 뿌리치고 남편이 감혀있는 해군초대소 로 달려갔다. 피투성이옷을 걸치고 수염이 꺼칠해서 누워있는 남편의 처참한 모습을 김로는 차마 눈뜨고 볼수 없었다. 병원에 가보니 남편은 발목의 뼈와 허리의 뼈 하나가 끊어져있었으며 목의 병도 오래지 않아 후두암으로 전이되리라는 진단을 받았
다.
1975년 간부학교가 해산됨에 따라 그들부부는 문화부에서 정치학습을 받고 새롭게 심사고찰을 겪었다. 그때에야 <정치문 제가 없음. >이란 초보적인 결론을 받았다. 1978년부터 김로는 북경과학교육영화제작공장의 정치처에서 5년간 사업하다가 1983 년에 정년리직하였다. 다년간의 편집생활가운데서 김로는 풍부한 경험을 쌓았는바 방문기자로부터 총편집에 이르기까지의 번다한 일들은 늘 혼자서 짧은 기일내에 말아하였다. 1986년 그는 <중 화전국신문공작자협회>로부터 <로신문사업일군>이라고 긍정받았 다. 김로부부는 슬하에 네 딸을 가졌는데 큰딸은 길림의과대학 에서 중의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둘째딸은 길림의학원 내과졸업 생, 셋째딸은 지금 북경공예미술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있는중 이며 막내딸은 8년간의 부대생활을 거친후 중국은행에서 일보고 있다. 현재 김로는 의연히 영화협회회원으로 활약하면서 남편 소위와 함께 회억많은 여생을 보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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